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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창조주’ 히긴스, 생각 다르면 적대시한 강박증 환자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 193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영화화된 작품이다. 우악스러운 꽃파는 처녀에서 품위있는 여인으로 변모한 일라이자(오드리 헵번)를 피커링 대령(윌프레드 하이드-화이트)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 민음사]
모든 콤플렉스는 우리 마음 속 어딘가 부서진 곳, 아픈 곳을 건드린다. 그 수많은 콤플렉스 중에서도 내 마음을 특히 아프게 찔렀던 것은 바로 ‘피그말리온 콤플렉스’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 아닌 나’의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나는 조금씩 피그말리온의 노예가 되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기대하는 나, 친구들이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애써 가장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1>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

다행히 이제는 사랑받기 위해 ‘나 아닌 나’가 되려는 몸부림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가끔은 유혹을 느낀다. 사실 피그말리온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매혹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그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못했던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자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상이 진짜 살아 있는 여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뭉클하다.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인간의 절실한 믿음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 소원이 아무리 불가능할지라도. 그 염원이 아무리 얼토당토않을지라도.

피그말리온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할수록 학업 성취도가 높아진다든지, 부모의 기대를 듬뿍 받은 아이가 실제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긍정적인 명칭이 어울린다. 하지만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바꾸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사람들의 깊은 상처와 노이로제를 묘사할 때는 ‘피그말리온 콤플렉스’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름의 꼬리표가 된다.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상대를 향한 사랑이 그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상대를 향한 지나친 기대가 오히려 그를 망칠 수 있다’는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이유다.

여성 혐오증에 걸린 우울한 지식인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더욱 유명해진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원작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신화 속에서는 조각상에서 진짜 여인으로 변모한 갈라테이아가 군말 없이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한층 지독한 패러디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 현실 속 여성에게서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피그말리온은 여성혐오증에 걸린 괴짜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로, 순순히 자신의 창조자의 명령을 따르던 갈라테이아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고집불통 아가씨 일라이자로 변신한다. 우악스러운 사투리와 뒷골목 은어를 섞어 가며 ‘영어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일라이자를 본 순간, 히긴스는 기절초풍하고 만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언어학자인지 증명하고 싶은 욕구로 말미암아 히긴스는 절친한 벗 휴 피커링 대령과 내기를 한다. “제가 여섯 달만 가르치면 저 아가씨를 공작부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어요.”

여성 혐오증에 걸린 우울한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숨기고 있는 히긴스. 그는 자신이 그런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일라이자에게 완벽한 영어 발음과 문법을 가르치고 아름다운 옷과 액세서리를 제공하며 귀족들의 에티켓을 주입한다.

그런데 신화 속 갈라테이아가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반면, 일라이자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자신의 의견을 당차게 주장한다. 일라이자는 알고 있었다. 피커링은 일라이자가 넝마주이였을 때조차도 어엿한 숙녀처럼 대했지만, 히긴스는 그녀가 아무리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변해 가도 여전히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대접한다는 것을. 차디찬 조각상조차도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고 조각상이 추울까 봐 담요까지 덮어 주었던 신화 속 피그말리온과 달리, 히긴스는 살아 있는 여인조차 버림받은 조각상처럼 냉대한다. 히긴스의 냉담함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타인만을 자기 곁에 두려는 이기심의 발로이며, ‘나의 의지’를 벗어나는 모든 타인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난 꽃을 팔았지, 내 자신을 팔진 않았어요”
히긴스 입장에서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하는 모든 타인이 적대자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히긴스가 강박증 환자라면, 히긴스의 마음에 들지 못할까 봐 끝없이 노심초사하는 일라이자는 신경증 환자인 셈이다. 히긴스는 자신의 뜻대로 완벽히 조종되는 세상을 꿈꾼다. 일라이자의 목표는 ‘올바른 영어’를 써서 어엿한 꽃가게 점원으로 취직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고상한 말투와 몸가짐을 익혀 버려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마침내 반년 간의 ‘요조숙녀 만들기’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일라이자의 눈부신 자태와 교양 있는 말투가 무도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데 성공했을 때도, 뛸 듯이 기뻐하는 히긴스와 달리 그녀는 기쁘지가 않다. “아! 차라리 꽃을 팔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왜 나의 독립을 빼앗아 간 거죠?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독립을 포기한 거죠? 좋은 옷들이 아무리 많아도 난 결국 노예나 다름없어요.”

자신을 공주처럼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 앞에서도 일라이자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난 꽃을 팔았지, 내 자신을 판 게 아니라고요!” “당신이 날 숙녀로 만들어 버린 지금, 이제 난 아무것도 팔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요.”

반면 히긴스는 원래의 목적에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그녀가 없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바둑판처럼 정확하게 구획돼 있던 그의 일상이 난해한 미로처럼 알 수 없는 길들의 연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히긴스는 모든 것을 조종하는 창조주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기상천외한 내기로 인해 진정 바뀐 것은 히긴스 자신이었으니, 갈라테이아로 인해 본질적으로 변화를 겪은 것은 피그말리온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히긴스는 실패하고 신화 속 피그말리온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피그말리온은 인간을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랑의 주체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숙녀와 꽃 파는 아가씨의 차이는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에요. 그 차이는 그녀를 어떻게 대우해 주느냐에 달려 있어요. 히긴스 박사님께 저는 항상 꽃 파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지요.”

히긴스는 일라이자의 반항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버나드 쇼의 원작에서는 일라이자가 히긴스를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리지만,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달콤한 여운으로 남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피조물처럼 보이는 존재가 창조주의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끝없이 상승만 생각하며 남의 삶 재단
히긴스 박사의 머릿속에는 ‘끝없는 상승의 화살표’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에는 거지나 진배없는 꽃 파는 아가씨를 여왕의 외모와 말투로 ‘끌어올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그녀가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차라리 다시 꽃 파는 아가씨로 추락할지라도 ‘나다운 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피그말리온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선입견’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버나드 쇼는 자신의 주체성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현대 여성들에게 조언한다. 결코 자신의 피그말리온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현대의 갈라테이아는 결코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창조주의 독선’을 꼬집지만,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창조주의 순수한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는 히긴스의 독선으로부터는 탈주하면서, 동시에 피그말리온의 천진무구한 사랑은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판매하는 ‘매니저식 사랑’을 넘어, 우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의 사소한 감정까지 배려하며, 결코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사랑’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 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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