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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IT가 만든 가상 광장서 무한 소통 … ‘수직 → 수평’으로 사회 패러다임

2008년 6월 10일 서울 광화문 일대 도로에 약 8만 명(경찰 추산, 추최 측 추산 70만 명)의 광우병 촛불시위 참가자가 결집했다. 6·10항쟁 21주년인 이날 열린 대규모 시위엔 노동계여성계종교계 단체가 대거 참가했으며 보수 성향 단체들도 맞불 집회를 열었다. [중앙포토]
“쇠고기 집회 참가자들이 몰려든 서울광장은 야외 음악회장 같았다. 가족·연인·친구들끼리 나온 시민들은 잔디밭에 앉아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이명박 XXX’라고 외치면 금방 ‘언어순화 합시다’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시위 참가자와 비참가자의)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다. 집회 장소로 가지 않고 장외(場外)에서 참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밤새워 인터넷으로 시위 생중계를 보고,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올린다.”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6> 뉴미디어와 2000년대

 2008년 6월 1일자 중앙SUNDAY가 게재한 ‘투사보다 월드컵 응원단 같은 생활인의 저항’이라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당시 중앙SUNDAY가 전한 촛불집회 현장은 마스크를 쓴 투사가 화염병을 던지며 반미·민주화를 외치던 권위주의 시절의 시위와 확연하게 달랐다.

 하지만 촛불시위 역시 시위대와 공권력이 정면 충돌하는 양태로 돌변했다. 불법과 폭력이 반복되는 양상은 약 석 달을 이어갔다. 막을 내린 촛불시위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한편에선 괴담에 현혹된 군중심리를 이용한 과격시위, 대선 불복 세력의 선동이라고 한다. 반대편에선 국민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한다.

 어떤 평가를 받든 촛불시위는 2008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대 이슈였다. 정치참여 구조 측면에서 우리가 다른 차원의 사회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누구나 기자 될 수 있는 시대로 변화
‘다른 차원의 사회’는 뉴미디어와 함께 도래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이른바 ‘인터넷 언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딴지일보(1998), 오마이뉴스(2000), 프레시안(2001) 등이다. 이들의 뉴스 표현·전달 방식은 파격이었다. 실시간으로 속보를 전했고, 패러디나 전에 없던 글쓰기로 대중을 끌어당겼다. 누구든 ‘시민기자’라는 이름으로 뉴스 생산자와 이용자 사이의 틈새를 파고들 수 있었다. 뉴스와 뉴스 아닌 것, 기자와 기자 아닌 기자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여기에 포털사이트, 인터넷 게시판, 블로그 등이 가세했다. 개인 혹은 집단이 전문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관이 담긴 사실과 의견을 무료로, 무제한으로 쏟아냈다. 이게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2008년 광우병 사태였다. 참여 주체, 의제 설정, 전개 과정에서 전에 없던 방식을 보여준 촛불 시위 초기의 모습은 한국의 정치·사회에 나름의 흔적을 남겼다.

 시위의 직접 원인은 그해 4월 18일 타결된 한·미 쇠고기 협상이었다. 합의에 따라 연령 30개월 미만의 소는 편도와 소장 끝부분만 제외하고 특정위험물질(SRM:두개골·뇌·눈·등골뼈·척수 등)을 포함한 모든 부위를 수입하게 됐다. 30개월 이상의 경우 SRM은 제외하고 뼈를 포함한 모든 부위의 수입이 가능해졌다.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된 후 해소되지 않은 국내 여론의 불안은 개방을 앞두고 증폭됐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담화문을 낸 5월 2일 촛불시위는 시작됐다. 정부의 설명보다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째로 수입한다니 어이가 없다.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는 여배우 김규리의 말이 더 먹혔다.

 먹거리나 안전 같은 생활형 이슈는 비정치적 개인의 집단적 의사 표현을 끌어냈다. 온라인에서 발화(發話)를 시작한 생활 담론은 10~30대의 네티즌이 발 빠르게 공유하는 콘텐트와 함께 예상 밖의 파급력을 보여줬다.

 사회 운동단체들이 본격 참여하기 전 시위 현장엔 학생·주부 등 일반인들이 주로 모였다. 손녀와 함께 나온 할머니가 돗자리를 깔고 양산을 펼친 채 광장에 앉았고, 핫팬츠에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성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정보를 얻고 온라인 동호회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생활정보를 공유하는 ‘82cook’, 패션 정보를 나누는 다음의 ‘삼국카페(소울드레서·화장발·쌍화차코코아)’, 야구 소식을 나누는 ‘MLB Park’ 등 정치와 상관없는 커뮤니티들이 개인 간 네트워크 장(場)이 됐다.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신화 등의 팬클럽도 나섰다.

촛불시위엔 청소년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영어몰입교육 등 교육 정책에 대한 청소년들의 거부감이 시위 현장에서 터져나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학생들의 참여는 이례적이었다. 과거 4·19 혁명과 87년 6월 항쟁에서도 중고생의 참여는 일부 이뤄졌지만 거대한 정치적 흐름이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2008년엔 달랐다. 논술 세대인 이들은 의사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사회정치적 의제에 관심도 컸다. 온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거리로 나와 행동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해 5월 전체 촛불시위 참가자의 약 50%는 청소년이었다.

 시위엔 ‘지도부’가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위험 논란, 정부의 대응 방식의 문제점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을 뿐 집단행동에 대한 전략이나 계획은 없었다. 광장에 모여서야 각자 한마디씩 얹어가며 시위를 진행했다. 5월 서울광장에 모인 행진 대열은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행진을 계속할지 말지도 쉽게 정하지 못했다. 시위대에 해산 방침을 통보하려던 경찰은 ‘대화 창구’를 찾지 못했다. 소수의 엘리트가 어젠다를 정하고, 대오를 조직·지휘하는 과거의 시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초는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말은 “이 대통령의 사고는 거의 7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강원택 서울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개인이 연결된 네트워크의 ‘롱테일 정치’
거리의 군중은 소수 엘리트 지배라는 전통적인 조직 원리를 깼다. 이른바 롱테일(long-tail) 운동이다. 정보의 독점이 깨지고 분자와 같은 개인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다수의 꼬리가 소수의 머리보다 때로는 큰 힘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심점 없는 ‘거리의 민주주의’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직접적이고 격렬한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 표출은 소통을 무시한 제도권 정치에 일침을 가할 수는 있었지만 권위주의적 정치구조와 행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정치단체가 개입하고 ‘MB 탄핵’과 같은 정치투쟁성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촛불시위는 정치시위로 변질됐다.

 광우병 촛불시위는 100차에 걸쳐 전국에서 2398차례 집회가 열렸고, 총 93만2680명(경찰 추산)이 참가했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대규모 집단행동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제도권 정치의 한계를 뚫고 출발한 촛불시위는 그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결국 촛불을 꺼뜨리고 말았다.

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2012년 12월 19일 대구시 중구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가 인증샷을 찍고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SNS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투표를 독려하는 ‘투표 인증샷’은 선거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스마트폰이 유희의 정치문화 만들어
2010년 이후 급속도로 보급된 스마트폰은 새로운 뉴미디어를 등장시켰다. 이는 또 새로운 방식으로 제도 정치에 영향을 줬다. 이때 뉴미디어의 이름표를 달고 나온 것이 팟캐스트·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이다. 특히 2010, 2011년의 여러 선거는 팟캐스트와 SNS를 무대로 치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0자의 단문을 주고받는 트위터가 가장 먼저 치열한 정치현장이 됐다. 많은 팔로어를 거느린 사용자의 멘션은 삽시간에 수십만에게 전달됐고, 리트윗을 통해 전파력을 키웠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넓고 빠르게 여론을 형성했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 직후 치러진 2010년 6·2 지방선거는 트위터의 위력을 보여줬다. 선거 결과는 여당의 절대 우세를 예측한 모든 여론조사를 배반했다. 선거 결과에 더 부합했던 건 SNS를 통해 퍼져 있던 ‘정권 심판론’이었다. 음모론이 난무하며 트위터 사용자들은 “1번(여당) 찍으면 전쟁 난다”는 말을 퍼날랐다. “정부가 천안함을 선거에 이용해 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근거 없는 주장은 ‘전쟁 대 평화’의 프레임을 형성했다. 우리 내부의 새로운 갈등구도, 즉 남남(南南) 갈등도 부추겼다. 이게 선거 판세를 바꿨다. 2011년 4·27 분당을 재·보선, 8·24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10·26 서울시장 재·보선에서도 투표 전후 트위터 사용량이 급증했다.

 팟캐스트 열풍은 2011년 4월 방송을 시작한 ‘나는 꼼수다(나꼼수)’로 시작됐다. 매회 직접 다운로드 건수가 200만 건을 넘고, 500만 명 이상이 듣는 것으로 추산됐다. 저열한 막말, ‘아니면 말고’ 식 폭로, 미확인 의혹 제기로 청취자를 오도한다는 비판이 컸다. 그래도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들은 ‘나꼼수’를 들으며 정치를 이야기했다. 이게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롱받던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사퇴했고, 각종 의혹에 휩싸인 나경원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뉴미디어가 당락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치인들은 저마다 계정을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 차원에서도 SNS 대책을 세우며 2040 표심 잡기에 나섰다.

 스마트폰은 미디어를 손안으로 가져다 줬다. 손안에 든 미디어를 통해 정치도 일상에 가까워졌다. 한마디의 멘션도, 한 개인의 패러디와 풍자도 힘을 가질 수 있다. 이제 정치참여는 어렵거나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비장하고 거창한 무대에서도 내려왔다. SNS를 통해 직접 후보에게 공약을 묻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인증샷을 남긴다. 이 모든 게 놀이처럼, 유행처럼 이뤄졌다. 뉴미디어 시대가 유희로써의 정치 행태를 촉발한 것이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의사결정과 참여 구조를 바꾼 뉴미디어가 대의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성급한 전망도 나왔다. 물론 통로는 넓어졌다. 특히 그간의 정보 유통 구조에선 그늘에 서야 했던 진보의 목소리가 그 통로를 통해 퍼지고 있다.

 그러나 손쉬운 뉴미디어를 통한 정보와 뉴스의 범람엔 어두운 그늘이 있다. 주관성·편향성 그리고 선정성이 흔히 지적된다. 시선을 잡아끌어 누구나 어떤 말이나 얹을 수 있게 됐지만, 허술한 게이트 키핑으로 공정성·정확성과 같은 핵심 가치는 뒷전으로 밀렸다. 가치를 망각한 뉴미디어 활용은 훗날 부메랑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나꼼수’ 진행자였던 김용민이 2012년 총선에 출마했을 때다. 그는 “유영철을 풀어가지고 부시·럼스펠드·라이스는 아예 XX를 해가지고 죽이는 거예요”라는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의 막말이 드러나 고전했다. 그는 결국 낙선했고, 그의 입이 민주당 패배의 한 원인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우리 앞에 또 어떤 미디어 환경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변화가 거듭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뉴미디어와 2000년대’라는 키워드는 앞으로도 늘 현재진행형이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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