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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망’ 터트린 날, 경찰은 돈으로 유족 회유했다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기사.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1987년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한 대학생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2단짜리 짤막한 기사였지만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이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중앙SUNDAY는 6·29 선언 28주기를 맞아 당시 박종철 사건을 특종 보도한 신성호(59·성균관대 교수) 청와대 홍보특별보좌관을 만났다. 신 특보는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 박종철 사건 보도로 그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연히 한 검찰 간부로부터 박종철군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엄청난 사건이라는 직감이 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날의 보도가 없었다면 박군의 죽음은 5공 시절의 의문사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 것”이라며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민주화를 최소한 몇 년 앞당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종철군의 죽음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어떻게 알았나.
“당시 법조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대검찰청 취재를 돌고 있었다. 어느 간부 방에 들어갔더니 나를 보고 앉으라고 하더라. 앉자마자 내뱉은 말이 ‘경찰 큰일났어’였다. 그 순간 뭔가 있다는 낌새를 느꼈다. 그래서 ‘그러게 말입니다’라며 나도 아는 척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성호 특보는 “박종철 고문 사건 보도가 민주화를 몇 년 앞당겼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처음 사실을 들었을 때 어땠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차를 마시는데 한 손으로 들면 손이 떨릴 거 같아서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마실 정도였다. 잠시 뒤 정신을 가다듬고 빈 방으로 가서 전화로 회사에 취재 내용을 보고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때부터 구체적인 취재가 시작됐다. 모자이크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팩트(사실)를 모았다.”

-취재가 쉽진 않았을 텐데.
“가장 결정적인 인적 사항을 알 수 없었다. 그 상태론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급히 서울지검 공안부로 뛰어가서 한 검사 방의 문을 확 열었다. 그러곤 다짜고짜 ‘죽은 서울대생 이름이 뭐죠’ 그랬더니 그분이 ‘박종 뭐더라’고 했다. ‘학과는요’라고 물었더니 ‘언어학과 3학년’이라고 했다. 바로 뛰어나와서 회사에 알렸다.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보니 언어학과 3학년생 중에 ‘박종’이 들어간 사람은 박종철군밖에 없었다. 박군 누나와 연결됐는데 ‘동생이 경찰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부모가 서울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했다. 그때가 낮 12시쯤이었는데 돌고 있던 윤전기를 세우고 기사를 급히 넣었다. 언론 검열이 심할 때라, 2단 기사였지만 시사 만화 옆에 배치해 눈에 잘 띄도록 노력했다. 그게 바로 박종철 사건 특종 기사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가 심했던 때였다. 두렵지 않았나.
“취재 과정에서 사회부장이 전화로 ‘자신 있느냐’고 물었다. ‘잘못되면 너랑 나랑 국장, 사장까지 줄줄이 남산이다’라고도 했다. 당시 안기부(현재의 국가정보원)가 남산 인근에 있었는데, 만약 잘못된 기사라면 안기부에 끌려가서 조사받는다는 뜻이었다.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해 정보기관에서 나를 잡아갈까봐 그날은 회사 근처 여관에서 잤다. 그때는 이게 내 기자생활의 끝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중앙일보 보도 직후 치안당국은 ‘탁 하고 치자 억 하고 죽었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외신들까지 중앙일보를 인용해 보도하니까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에서 공식 발표를 통해 박군의 사망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고문 부분을 숨기고 쇼크사라고만 발표했다. 그러고는 언론사에 보도 지침을 내렸다. ‘신문은 사회면 3단, 방송은 그림 없이 한 줄 단신’이었다. 그런데 중앙일보의 첫 보도가 나온 지 이틀 만인 17일 정구영 당시 서울지검장이 물 고문 혐의가 있다는 말을 하면서 이 사건이 모든 신문사의 1면 톱기사가 됐다. 그 이후로 보도 통제가 안 됐다. 한마디로 댐이 무너진 거다.”

‘딥 스로트’ 보호 위해 25년 동안 함구
박종철 사건 보도 이후 세간의 가장 큰 궁금증은 박군이 숨진 사실을 알려준 결정적 제보자, 즉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내부 제보자)’가 누군가였다. 하지만 신 특보는 그동안 이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25년이 지난 2012년 ‘박종철 탐사보도와 한국의 민주화 정책변화’라는 주제로 받은 언론학 박사학위 논문 속에서 제보자의 실명을 공개했다. 제보자는 이홍규 당시 대검 공안4과장이었다. 이 전 과장은 사건 제보 이유에 대해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이를 묻으려 해 너무 화가 나서 한 일”이라고 밝혔다.

신 특보에게 제보자에 대해 침묵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당시 그가 현직 검찰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사실이 밝혀지면 다른 걸 뒤져서라도 옷을 벗기는 건 물론 구속할 수도 있었다”며 “편집국 내에서도 사회부장이나 편집국장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그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논문을 쓰면서 이제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그를 설득해 이름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만약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그해 6월항쟁과 민주화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신 특보는 논문에서 “5공 정부는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초기부터 철저히 숨기고 축소하려 했지만 언론의 연이은 추적 보도를 통해 사건의 진실이 속속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며 “범인 축소·조작 사실까지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무서운 폭발력을 얻었고 6월 항쟁과 민주화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첫 보도 후 전 언론이 진상 추적
-그날의 보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경찰은 처음에 사건 자체를 덮으려고 했고 실제로 그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앙일보 기사가 인쇄되던 그날 낮에 이미 박군 아버지가 민·형사상의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합의서를 썼기 때문에 검사 지휘를 받아 시체를 화장해버리면 증거가 다 없어져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언론이 산통을 깬 거다. 나중에 박군 아버지에게 물어봤더니 ‘갑자기 조사받는 과정에서 쓰러져서 죽었다. 쇼크사다’라는 설명만 듣고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고 하더라.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합의금으로 9500만원을 받기로 했는데 당시로선 아파트 2∼3채 값에 맞먹는 큰돈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나.
“박종철군의 죽음이 세상이 알려진 직후 대학가에서 시위가 번지기 시작했다. 2월 7일에는 전국적으로 추도회가 열렸다.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만약 박종철 사건 보도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5공 시절의 의문사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적 흐름으로 보면 민주화는 결국 이뤄졌겠지만 박종철 사건이 한국의 민주화를 최소한 몇 년은 앞당겼다고 본다. 학계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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