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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라스의 위험한 도박 … “그렉시트 확률 50% 넘어”

지난 26일 국제 채권단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그리스 공산당원들이 아테네 도심 신타그마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AP/뉴시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배수진을 치고 위험한 도박판을 벌였다. 그가 27일(현지시간) 새벽 1시에 기습작전하듯 국민투표 카드를 꺼낸 것은 채권단의 긴축안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위시한 유럽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채권단은 그리스가 연금 축소 등 강력한 긴축정책을 펴 경제를 재건하고 남은 부채를 모두 상환하라고 요구해 왔다. 더 이상 밑빠진 독에 물붓듯 그리스에 자금을 지원해 줄 수 없으며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제금융도 없다고 압박해 왔다.

치프라스 총리는 5개월 전 이런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한 뒤 총리에 취임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에서 강력하게 추진됐던 구조조정 등은 애초부터 할 마음이 없었다. 만약 그가 트로이카(IMF·ECB(유럽중앙은행)·EU(유럽연합))로 불리는 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을 받아들이면 사실상 정치 생명은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치프라스가 마지막 카드인 국민투표를 들고 나온 이유다.

유럽 재무장관들, 긴급 회동
치프라스는 채권단이 연금을 줄이고 세금을 인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이고 굴욕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채권단과 그리스는 연금 삭감과 법인세 인상, 부자 증세 등의 방안을 놓고 협상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치프라스는 “채권단의 제안을 보면 이건 실행가능한 합의가 아니라 그리스 국민의 굴욕을 목표로 한다. 유럽 협약, 노동과 평등, 존엄에 대한 기본권 위반”이라고 말했다. 치프라스는 자신이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그리스 국민이 긴축정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며 채권단에게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독일 등 유로존 국가 지도자들은 “함부로 우리 세금을 그리스에 지원하지 말라는 게 우리 국민의 민주적 의사”라며 맞섰다. 자금 지원을 하려면 그리스가 긴축정책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2010년(1차), 2012년(2차) 두 차례에 걸쳐 245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 그 프로그램이 이달 말 끝난다. 채권단은 구제금융을 분할해 지원해 왔는데 현재 남은 지원금은 72억 유로다. 이 지원금을 받아야 이달 30일 만기가 돌아오는 IMF 부채 15억4000만 유로를 갚을 수 있다. 이후 추가협상을 통해 새로운 구제금융을 받아야 남은 채무를 상환해 나갈 수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시행을 발표하자 유럽 재무장관들은 27일 브뤼셀에 모여 추가 구제금융 대신 그리스 문제를 해결할 방책이 있을지 논의했다. 자본통제가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의 민간 은행들이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다음달 5일까지 계속 영업을 할 수 있을지, 그리스 정부가 실제로 자본통제에 들어갈지도 미지수다. 모든 건 그리스의 뱅크런 사태를 막기 위해 ECB가 긴급유동성지원(ELA)을 그리스에 제공할 의향이 있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ECB가 그리스에 추가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 정부는 은행들에 현금지급기(ATM) 인출이나 각종 금융거래를 정지하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날 야니스 드라가사키스 그리스 부총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ECB 본부를 찾아 국민투표를 할 때까지 유동성 공급을 계속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그리스 관리들이 밝혔다. 그렇지만 ECB가 그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일부 EU관리들은 그리스가 유로존 정부에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테네오 인텔레전스 애널리스트 볼프강 피콜리는 “치프라스의 발표로 그리스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날 가능성은 최소 50%로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고 해서 몇 년전처럼 글로벌 금융시장에 큰 혼란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리스 채권자는 대부분 유럽 국가나 기관이다. 민간 은행들이 그리스에 빌려 준 돈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만 최악의 경우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첫 사례가 되면서 유로존의 결속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스페인·이탈리아 등 재정이 취약한 남유럽 국가에 미치는 악영향도 상당할 것이다. 투기 자본이 재정상황이 좋지 않은 유로존 국가들을 타깃으로 삼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 채권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뱅크런이나 자본통제 가능성 측면에서 현재 그리스 상황은 2013년 키프로스 사태와 흡사한 부분이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유로존과 IMF에서 100억 유로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자본통제를 실시한 키프로스보다 그리스의 재정 상황이 훨씬 더 나쁘다는 게 문제다.

그리스 국민투표는 “유로존에 남아있는 조건으로 강력한 긴축정책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묻는 내용이다. 그리스 국민이 채권단 안을 받아들이면 불확실성이 상당히 제거되면서 그리스 경제가 안정세로 돌아설 수 있다. 이 경우 시리자 정권은 퇴진할 수밖에 없다. 반면 채권단 안을 거부하는 결과가 나오면 그리스는 채무 상환을 할 길이 없어지고 디폴트와 함께 유로존에서 탈퇴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스 국민 투표, 위헌 논란도
현재 그리스 국민은 불안해하고 있다. 예금주들은 ATM으로 몰려들어 예금을 인출하고 있다. 아테네 전역에 있는 은행들 밖에는 시민들이 줄을 섰다. 이들은 자본 통제가 조만간 발표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가브리엘 사켈라리데스 정부 대변인은 “(국민투표는) 유로존에 머물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국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스 야당은 정부를 맹비난했다. 안토니스 사마라스 신민주당 대표는 시리자 정부가 그리스를 유로존과 EU에서 퇴출당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치프라스 총리는 막다른 골목으로 국가를 내몰았다”고 비판했다.

한편 국민투표를 위해선 그리스 내각이 국민투표안을 의회에 제출하는데, 의회는 이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의회는 27일 정오에 소집돼 국민투표안을 놓고 표결한다. 의회를 통과하려면 정원 300명 중 151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의회를 통과하게 되면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공식 발표한다. 투표 결과가 유효하려면 투표율이 40%를 넘어야 한다. 투표 시간은 오전 7시에서 오후 7시까지이며, 결과는 다음날 발표된다. 다만 이번 국민투표가 위헌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리스 헌법은 재정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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