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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시대공감] 북한, 외제차 살 돈으로 식량 수입했다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지난 16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이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모내기를 한 벼 중 30%가 말라죽었다고 덧붙였다. 이튿날 유엔식량농업기구(FAO)도 각종 농작물이 악영향을 받았으며 올해 북한 농사의 반이 날아갈 지경이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이런 문제를 인정한 건 이례적이다.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국제사회에 넌지시 식량지원을 촉구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북한 고위관리는 내게 “지원을 공식 요청할 생각은 없지만 간헐적으로 식량이 들어온다면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자신들이 국제사회에 지원을 촉구한 전례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당시 지원 요청은 이미 늦은 단계에서 이뤄졌지만 곧 세계적인 원조 움직임이 일어났고 엄청난 양의 식량이 실제로 지원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때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 경제, 나아가 김정일 정권이 붕괴했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국제사회가 그렇게 너그러울 지는 미지수다. 주요 지원국들은 북한이라면 이제 이골이 났다. 어떻게 해도 자력갱생하지 못하고, 미사일은 개발하면서 주민에겐 먹을 것도 챙겨 주지 못하는 북한 정권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20년 전에 비해 지원을 요청하는 국가와 지역이 많아졌다는 점도 북한에는 불리하다. 세계식량계획(WFP)을 포함해 북한 내 유엔 기구에 할당된 예산은 2004년 3억 달러에서 지난해 5000만 달러로 줄었다.

북한이 외국인 방문객에게 가장 강조하는 김정은의 메시지는 “다시는 고난의 행군이 없을 것”이란 발언이다. 2013년 김정은은 첫 신년사에서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경제적성과, 특히 식량난의 근절을 그의 정통성의 핵심 요소로 삼은 것이다. 이번 가뭄이 북한을 90년대의 재난 상황으로 돌려보내지는 않겠지만 경제가 꼭 그 정도로 나빠져야만 북한 정권이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실제로 얼마나 나빠지느냐보다 북한 주민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현재 상당수 북한 주민들이 그들의 생활수준이 아주 느리게나마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밥그릇에 들어갈 밥이 현저히 줄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2의 고난의 행군’ 얘기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 북한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려고 할까. 지원을 희망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일부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모자라는 식량을 다 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북한 가뭄에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북한이 거부하는 남북대화 재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 국무부 관계자도 대북 식량지원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보다 건설적인 방법은 농부들에게 수확한 곡식을 스스로 소비하거나 팔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농부들이 경제 권력을 쥘 수 있고, 군에 엄청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필요성을 생각하면 북한 정권엔 좋은 옵션이 아니다.

자산을 재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2013년 북한이 고위층의 외제차 등 명품 구입에 6000만 달러를 썼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통상 자연재해로 인한 북한의 쌀 부족량이 연간 50만t 정도였다는 점과 국제 곡물시장에서 쌀 1t이 400달러 미만인 점을 감안하면 북한이 고위층 명품 소비의 3분의 1 정도만 줄여도 쌀 부족분을 수입해서 충당할 수 있다. 아무리 이런 논리가 윤리적으로 옳아도 북한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핵심 지지기반인 평양 고위층이 고가의 외국산 위스키를 못 마시는 사태가 일반 주민들이 먹을 게 없는 상황보다 더 정권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국지 도발로 국제사회를 협상장에 불러내고 식량지원을 조건으로 내걸 수도 있다. 이 경우 올 초 단거리 미사일 발사 때처럼 국제사회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히려 한국의 무력 대응만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북한 정권에는 지금이 굉장히 답답한 상황일 수 있다. 만약 북한 정권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면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은 올해 남은 기간 동안 계속 고조될 것이다. 김정은은 계속 숙청 정치를 이어갈 것이다. 가뭄이 자연재해라는 점, 즉 정권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대규모 동원 행사도 벌어질 것이다.

이번 가뭄은 북한경제가 최근 상대적으로 호전된 것이 어떤 치밀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랬기 때문이란 걸 보여준다. 일부 성과는 농업 개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날씨가 좋아서 수확량이 안정적이었다는 얘기다. 계속 날씨가 좋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까지 김정은 정권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계속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또 어디 있겠는가.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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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