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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게 못돼 먹었어"… 당돌한 쑨웨이스에 화난 장칭

장칭과 쑨웨이스의 악연도 무대에서 시작됐다. 1932년 1월 20일, 일본해군 육전대가 상하이에 상륙했다. 8일 후 중국군과 충돌했다. 승리는 일본군의 몫이었다. 중국군과 거류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후손들에 자랑하고도 남을 얘깃거리들을 양산했다.

1937년 겨울, 옌안의 각급 기관들은 상하이 항전(抗戰) 6주년을 앞두고 분주했다. 문화 예술계도 무대극 '혈제상해(血祭上海)'를 준비했다. 남자 연기자는 널려 있었지만 여자 연기자 구하기가 힘들었다.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자본가의 둘째 부인과 큰딸 역은 잡지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청년이 장칭(江靑·강청)과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를 추천하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었다.

1938년 1월 28일부터 20일간 계속된 '혈제상해'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다시 무대에 오른 장칭은 둘째 부인 역을 멋들어지게 소화했다. 큰딸 역을 맡은 쑨웨이스의 연기도 손색이 없었다. 장칭과 함께 옌안의 화제 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쑨웨이스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에게 관람을 청했다. 공연장에 마오가 나타나자 중공선전부는 경악했다. 공연 마지막 날 출연자들을 위해 조촐한 연회를 준비했다. 연회에 마오가 참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오쩌둥은 연기자들에게 직접 술을 따라줬다. 예술학원 설립도 제의했다. 함께 온 장원톈(張聞天·장문천)이 마오에게 예술학원 원장직을 제의하자 장칭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주석의 원장직 겸직에 동의한다.” 누군가 “이타이타이(姨太太·둘째부인)의 제안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라고 하자 환호와 웃음이 뒤범벅이 됐다.

딸들은 엄마의 장점과 아버지의 단점을 닮는 경우가 많다. 쑨웨이스는 대 혁명가 쑨빙원(孫炳文·손병문)의 딸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나대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상하이에서 온갖 잡스러운 짓은 다하고 다닌 주제에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댄다”며 장칭을 노려봤다. 쑨웨이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있어도, 마오가 예술학원 원장을 맡을 일은 없었다.

장칭과 마오쩌둥의 결혼소식을 들은 쑨웨이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혈상해' 공연 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안갔다. 모스크바에 유학중이라고 알고 있던 허즈쩐(賀子珍·하자진)이 마오와 이혼했다는 말을 듣자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온종일 넋 나간 사람처럼 한자리에 앉아 있기 일쑤였다. 눈치를 챈 큰 이모가 “남녀 사이는 몇 십분 상관으로 지옥과 천당을 오갈 수 있다”며 달래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쑨웨이스는 마오쩌둥의 숙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장칭은 몇 개월 전의 장칭이 아니었다. 한번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장칭이 먼저 말을 걸었다. “주석이 웨이스 보기가 힘들다며 네 말을 자주한다.” 쑨웨이스는 팩했다. “요즘 너무 바빠요. 거기 갈 시간 없어요.” 아무 때나 상관없다며 시간을 내서 한 번 들르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획 돌아서 가버렸다. 볼 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장칭도 화를 냈다. “어린 게 당돌하고 못돼 먹었다.”

말에서 추락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부상을 입었다. 상태가 심각했다. 완치를 위해 모스크바행을 결정했다. 환송 나온 쑨웨이스는 비행기 출발 직전 저우에게 졸랐다. “나도 따라 가겠다.” 주석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말을 타고 마오의 숙소로 치달았다. 쑨웨이스는 옆에 있던 장칭은 본체만체, 마오에게 매달렸다. 마오는 즉석에서 허락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쑨웨이스는 총상을 치료하러 와 있던 청년장군 린뱌오(林彪·임표)의 눈에 들었다.

장칭은 속이 시원했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경호원들에게 거의 비슷한 인상을 남겼다. “옌안에 머무르는 10년 간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소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주석의 생활을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먹고 마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비록 생활비서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마오쩌둥의 부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표현력도 뛰어났다.”

신중국 성립 후 문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장칭의 생활은 모범적이었다. 문혁이 시작되자 딴 사람으로 변했다. 마오와 허즈쩐 사이에서 태어난 리민(李敏)의 회상을 소개한다.

“세상 사람이 다 그런 것처럼, 장칭도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다. 나빴다가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괜찮다는 소리를 듣다가 형편없이 변하는 사람도 있다. 장칭은 후자에 속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오빠의 빨래거리도 직접 챙겼다고 들었다. 변한 다음부터 가족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만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항상 주석이라고 불렀을 뿐,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는 주석의 학생이며 불침번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문혁 시절에도 12월 26일, 아버지의 생일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만든 국수를 대접했다. 감옥에 갇혔을 때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 생일날 기념관에 화환을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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