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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 중 1명 이성교제 도중 폭력 경험” … 작년 52명 숨져

그 남자와 그 여자는 2008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2012년까지 연인으로 지냈다. 남자는 자주 폭언을 했고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다음날이면 후회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거나 응원하는 야구팀이 지면 다시 짜증을 냈고, 때렸다.

“네가 좀 구타유발자잖아” “내가 화난 것은 너의 책임”이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남자는 제정신이 들면 자괴감에 빠졌다. 여자는 관계를 끊지 못했다.

여자는 “맞지 않는 것보다 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데이트 폭력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이 사연은 차세대 진보논객으로 주목받던 한윤형(32)씨와 그의 전 여자친구 A씨(24)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스로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고 활동해온 A씨가 지난 19일 이런 내용의 어두운 연애사를 개인 블로그에 올리자 파장이 일었다. 박가분씨도 진보논객인데 박씨의 전 여자친구가 ‘A씨를 지지한다’며 자신이 겪은 데이트 폭력을 털어놓았다. 두 사건을 계기로 데이트 폭력 고백이 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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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데이트 폭력은 특정 집단이나 세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이 최근 경찰청에서 입수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매년 6000~7000건의 데이트 범죄가 발생한다. 지난해엔 52명이 데이트 범죄로 목숨을 잃었다.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강간·강제추행 사건 증가세가 특히 두드러진다. 2010년 371건에서 지난해 678건을 기록했다.

성범죄 사건 전문인 이재용 변호사는 “한 달 평균 10여 건의 데이트 폭력 관련 상담을 진행한다”고 전했다. 범죄 통계에 잡히지 않고 묻히는 사건도 많다고 한다. 서경현 삼육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3명 중 1명은 이성교제 도중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데이트 폭력 가해자·피해자 연령대는 20대가 많고 30~50대에서도 고루 나타난다.

한국 여성의 전화, 미국 법무부 등이 후원하는 러브이즈리스펙트(loveisrespect.org) 등 데이트 폭력 관련 국내외 기관들에 따르면 지나친 사생활 간섭,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잦은 연락, 외모·옷차림에 대한 지적, 별명 부르기, 나쁜 소문 퍼뜨리기 등도 데이트 폭력에 해당한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다수는 여성이지만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전모(45·여)씨는 지난해 8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만나 달라”고 유인해 수면유도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성관계를 시도한 혐의(집단 흉기 등 상해)로 올해 초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여대생 한모(22)씨는 동성 애인(20)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가 기소됐다.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폭력의 수위는 남성 가해자 못지않았다. 자신과 친한 남동생과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주방가위로 얼굴을 찌르려다 실패하자 목을 졸랐다. 이후 전기밥통으로 머리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한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지난 18일 2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돼 풀려났다.


◆왜 관계를 끝내지 못하나=변신원 한국양성평등진흥원 교수는 “시간이 가면 바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관계를 끝맺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실수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사과할 때는 진심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애원한다. 피해자들은 이를 믿고 변화를 기대한다. 하지만 제3자의 적절한 개입이나 치료 없이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폭력-반성-사과-용서’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무한 반복되는 이유다. 일반적인 연애에서의 다툼과 데이트 폭력의 경계가 모호해 피해자들이 혼란을 겪기도 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런 관계는 오래 지속될수록 양쪽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은 “사람들은 대개 남들에게 행복해 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어 애인에게 맞는다는 얘기를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피해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잘 헤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문제”라며 “피해자 중에는 일부러 살을 찌우거나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해 가해자를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주변의 시선이나 ‘낙인 효과’에 대한 두려움도 나쁜 연애를 단절하는 데 걸림돌이다. 여대생 이모(25)씨는 편입학 동기인 권모(29)씨를 2013년 만났다. 권씨는 이씨가 원치 않는데도 스킨십을 강요했다. 이씨가 반항하자 권씨는 “동기 모임에서 너를 제외해 버릴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씨는 11명뿐인 편입 동기생들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게 두려워 끌려다녔다. 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DVD 방에 따라가거나 스킨십 요구에 응했다고 한다. 이씨의 부모가 이런 사실을 알고 경찰에 고발했고 권씨는 재판에 넘겨졌다. 권씨는 “연인 사이에서 모두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지난달 서울고법은 권씨에게 징역 5년에 위치추적장치 부착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권씨의 상고로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폭행, 추행에 디지털 데이트 폭력 동반=“나 너네 집(본가) 주소도 알고 있다. OO군, OO면, OO2리….” “1월 12일 화장품을 사고 카페 간 거 난 다 보고 있어.” “기억나, 너의 나체 사진. (나는) 형부들과 언니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다 알고 있지.”

지난해 9월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인 대학생 홍모(23)씨가 전 여자친구 권모(25)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의 일부다. 이들의 사례는 최근 데이트 폭력 양상을 잘 보여준다. 폭행과 성적 학대에 디지털을 이용한 감시와 폭력이 동반된다. 성관계 동영상이나 사진을 올리겠다는 협박이 가장 빈번하다.

‘한번 인터넷에 올라가면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신고를 망설이면서 피해가 커진다. 홍씨는 스마트폰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권씨와 교제하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헤어진 뒤에도 권씨의 집으로 찾아가 폭행했고 나가 달라는 애원에도 한 달씩 진을 치면서 머물렀다.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다는 이유로 강아지 목줄로 손발을 묶어놓고 때렸다.

이사를 다니고 휴대전화를 바꿔도 괴롭힘은 계속됐다. 권씨는 동영상·사진을 유출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교제를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지친 권씨가 자신의 부모에게 털어놓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법무법인 윈의 이인철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헤어지고 싶어도 한번 인터넷에 자료가 올라가면 회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쉽게 고소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런 행동은 심각한 범죄라서 중한 처벌을 받게 되지만 피해자는 처벌보다 가해자를 달래 좋게 해결하려고 혼자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성 역할에 대한 한국적 상황이 데이트 폭력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화영 소장은 “사회에서 남성에게 전형적인 남성성이나 남자다움을 주입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드라마 등에서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억지로 키스하거나 강제로 손목을 끌고 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라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서 교수는 “데이트를 하면서 폭력을 사용한 사람이 결혼한 뒤 폭력을 쓰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데이트 도중에 폭력적 특성이 발견된다면 과감히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S BOX] 가족·친구에게 행선지 알리고, 폭력 증거물 확보해둬라

도대체 왜 계속 끌려만 다니는가. 데이트 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갖게 되는 의문이다. 10대의 어린 피해자뿐만 아니라 외견상 멀쩡해 보이는 성인들도 폭력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아서다.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현재의 상황이 사랑인지 폭력인지 혼란스러워하거나 관계를 정리하는 걸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사자가 ▶이미 폭력적 관계에 중독돼 있거나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을 아까워하거나 ▶폭력적이더라도 연인이 있는 편이 좋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대처법.

 ◆가족·친구·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라=당사자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반면 이들이 훨씬 더 적절하고 이성적인 대처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 학교·직장 등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불가피하게 혼자 있어야 할 때는 반드시 가족이나 친구에게 행선지와 귀가 시간을 알려라. 동선을 자주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가해자를 만나지 말라=혼자 만나는 건 특히 금기다. 다시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 피해자들은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변화를 기대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꼭 만나야 한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만나라.

 ◆자세히 기록하라=말, 행동, 피해 상황 등을 최대한 상세하게 적어둔다. 물리적인 상처를 입었다면 사진으로 기록해 둔다. 폭력의 증거물(부서진 물건, 문자메시지 등)도 보관한다. 가해자가 다시 폭력을 휘두르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때 대처 방식을 예행연습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영선·정혁준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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