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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 통과 ‘혁명 동업자’서 조력자 된 2인자 … JP “박 대통령 마지막 출마” 유세 … 유신 상상 못했다

1971년 4월 12일 제7대 대통령선거 지원유세에 나선 김종필(JP) 민주공화당 부총재가 강원도 원주에서 박정희 대통령 지지 연설을 하고 있다. JP는 “북괴의 남침야욕 등 안보 문제가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뿐”이라고 말했다. [자료사진 조선일보]


1969년 3선개헌(三選改憲)으로 가는 길목에서 박정희와 김종필(JP)은 충돌했다. 68년 봄 JP는 ‘자기 자리를 넘본다’는 박정희의 의심 속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야인이 된 JP는 박 대통령에게 ‘내가 나세르냐’며 대들기도 했다(6월 17일자 참조). 69년 여름 박정희는 ‘혁명 의리론’과 눈물로 JP를 설득했다. JP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6월 19일자). 개헌 반대에서 개헌 지지로 선회한 것이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9> 3선개헌과 1971년 대선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3선개헌을 지지하기로 한 뒤 나는 어제까지 개헌 반대에 뜻을 모았던 동지들을 설득해야 했다. 박 대통령을 모시고 혁명을 한 업보(業報)로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개헌을 하려면 재적의원(171명)의 3분의 2(114명)가 찬성해야 한다. 그런데 당 내 개헌 추진세력인 4인체제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이 총동원돼 찬성 서명을 받은 의원은 90명에 불과했다. 25명 정도가 부족했다. 당 내 개헌 반대 의원들을 찬성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박 대통령의 뜻이 꺾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동지들을 전방위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7월 26일 오전 서울 태릉골프장에서 김용태·양순직·정태성·예춘호·김성희·장영순 의원 등과 골프를 치면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전하고 “한 번만 더 하시겠다고 하는데 속는 셈치고 도와드리자”고 말했다. 이튿날엔 청구동 집에서 김용태·양순직·정태성·예춘호 등 제명 의원들을 또다시 불러 설득했다. 하지만 이들은 나에게 유감을 표시하며 오히려 초지일관 개헌에 반대할 것을 설득했다. 혁명의 동기와 공화당 창당 이념을 생각할 때 3선개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예춘호 의원은 생각이 분명했다. 그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당의장님만은 개헌 반대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며 끝까지 개헌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내 곁을 떠나버렸다. 겉으론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인간적인 섭섭함과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 대통령을 버릴 수 없었다.



 7월 29일 영빈관(지금 신라호텔의 부속 건물)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도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3선개헌 반대론을 주장했던 이만섭 의원이 개헌 찬성의 명분으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정보부장을 퇴진시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개헌 논의가 실력자 퇴진 문제로 묘하게 흘러갔다. 이 실장과 김 부장의 전횡을 아니꼽게 생각했던 의원들이 하나둘씩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8시간 동안 열린 의총은 개헌 결의로 기울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정구영 총재(왼쪽)가 당 행사에서 예춘호 사무총장과 함께 자리를 했다. [중앙포토]
 정구영 선생은 공화당에 남아 끝까지 3선개헌을 반대한 분이다. 공화당 초대 총재(1963년 2~8월)를 지낸 그는 3선개헌이 박 대통령과 같은 민족적 영도자에게 허물을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헌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69년 8월 31일 정 선생이 청구동 집으로 찾아왔다. 내 입장을 잘 아는 그는 “개헌에 대해 반대나 찬성을 하지 말고 그냥 침묵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정 선생은 세월이 흐른 뒤 “이상론(理想論)으로는 납득이 안 갈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과 지향하는 내일을 보면 박 대통령의 선택은 과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3선개헌안은 9월 9일 국회에 상정됐다. 일요일인 14일 새벽 본회의장에서 반대 농성 중인 신민당 의원들을 피해 국회 제3별관에 공화당·무소속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통과됐다. 이제 개헌안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절차가 남았다. 나는 10월 17일 국민투표 날까지 하루 800리, 전국 50여 개 지역에 다니며 개헌 지지 유세를 했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었다. 지방 유세를 위해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흔들리면서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전국을 두 바퀴 돌았다.







 유세장에선 역시 우려했던 질문들이 쏟아졌다. “박 대통령이 1975년에 다시 출마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후계자를 내세우면 공화당은 개헌을 하지 않고도 계속해 집권할 수 있지 않으냐.”



 나는 나름의 논리를 준비해 그들을 설득했다. “박 대통령은 75년에 절대로 다시 나설 분이 아니다. 이번에도 얼마나 고뇌하셨는지 여러분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또 새 헌법은 4선(選)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박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볼 때 공화당에서 후계자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대통령의 3선 이후 유신체제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3선개헌안은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71년 3월 18일 나는 신설된 공화당 부총재(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에 임명됐다. 그것은 7대 대선(4월 27일)을 한 달여 앞두고 선거에 앞장서 달라는 박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4월 17일 대구에서 열린 대선 유세장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수성천변에 마련된 유세장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단상에서 둘러보니 앞줄에 갓을 쓰고 곰방대를 입에 문 노인들이 죽 앉아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을 한번 더 모십시다”라며 열띤 연설을 했다. 그랬더니 그 노인들이 “이봐, 이제 옆에 있는 분(박 대통령) 그만 하라고 하고 이번엔 자네가 해”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경상도 목소리가 연단까지 크게 들렸다. 다른 데도 아닌 박 대통령의 지역 기반인 대구 한복판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당 내에서 경계 대상인데, 박 대통령이 바로 내 옆에 앉아서 이 말을 들었으니 여간 당황스럽지 않았다. 나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됐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박 대통령의 낯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내 유세 순서를 끝내자마자 나는 바로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다음 유세지인 전남 나주로 도망치듯 떠났다. 그런데 나주에 가서 보니 호주머니에 쓸 자금이 한 푼도 없었다. 다행히 뒤를 따라오던 윤천주 의원이 돈을 좀 가져왔다. 그때 내 처지가 대체로 그랬다. 국민복지회사건(68년 5월)과 소위 4·8항명(69년 4월)으로 동지들이 공화당에서 제명된 뒤라 나는 부총재임에도 불구하고 당의 재정적 도움 없이 전국을 돌며 유세를 해야 했다. 돈줄을 쥐고 있던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나를 계속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처지가 그랬지만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대구 유세의 에피소드 이후 김성곤 위원장을 필두로 한 개헌 주도 4인방(백남억·길재호·김진만)은 나를 경상도 유세에 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들은 내 유세 일정을 충청도·강원도·경기도로만 짰다. 그런데 경남 유세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단상에 4인방이 나갔지만 사람들은 모였다가도 흩어졌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또 나를 불렀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래? 경북 사람들이 경남에 가서 뭘 호소해. 그런다고 들어 주나.’ 그렇게 대선 전날까지 35일간 총 81회에 걸쳐 1만2769㎞를 강행군했다.



 박 대통령은 4월 27일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95만 표 차이로 승리해 제7대 대통령에 올랐다. 나는 6월 4일 제11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실제 나의 위상은 혁명 초기 한 시대의 연출자 겸 동업자에서 이 무렵엔 조력자(助力者)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4·8항명으로 제명됐던 예춘호(부산 영도)·양순직(충남 논산) 의원이 70년 말 복당(復黨)해 공천을 받았지만 선거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71년 8대 총선이었다. 유권자들은 물론 지구당 당원들도 한번 나갔다 다시 들어온 정치인에게 냉담했다. 두 의원은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정성태 의원 등 처음에 3선개헌에 반대하다 나중에 돌아선 동지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선이 끝나고 닷새 뒤인 6월 9일 공화당 당직 개편이 있었다. 4인방들이 예정이라도 된 듯 당 요직에 올랐다. 당의장에는 백남억 의원이 유임됐고, 길재호 의원이 신임 정책위의장이 됐다. 김진만 의원은 재정위원장 자리를, 김성곤 의원은 중앙위의장 자리를 꿰찼다.



 나는 지금도 3선개헌에 대한 나의 입장 변경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박 대통령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18년 통치기간 동안 이룩해 놓은 업적을 생각할 때 나의 결정은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끝까지 반대했으면 3선개헌은 안 됐을 것이고, 이 나라의 장래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엔 박 대통령을 이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박 대통령의 걱정도 그것이었고, 내가 3선개헌에 동의한 것도 그런 점에서였다.





● 인물 소사전 이만섭(83)=동아일보 기자 출신 정치인. 5·16 직후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을 주장하는 윤보선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이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조국 근대화’ 명분에 찬성해 스스로 민주공화당에 입당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8선 의원(7·10·11·12·14·15·16대)에 올랐다. 85년에는 과거 공화당 및 유정회 소속 의원들을 규합해 만든 한국국민당의 총재가 됐다. 14대(93년 임기 시작)와 16대(2000년)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두 번 지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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