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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반년 전 박정희 “늦어도 6월엔 북한군 남침한다” 군 수뇌부 ‘적정보고서’ 무시 … JP “적을 알고도 당했다”

6·25 남침 이듬해인 1951년 김종필 육군본부 정보국 대위가 상황실에서 지시봉으로 괘도를 가리키며 적정을 브리핑하고 있다. 맨 위에 한자로 ‘적의 공격 징후’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JP는 1949년 6월부터 육본 정보국에서 일해왔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중앙포토]

“떨어집니다. 대구경 포탄이 아군 진지에 마구 떨어집니다. 적의 공격입니다. 전차도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육군본부 정보국의 수화기를 들자 의정부 제7사단 정보장교의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마치 숨 넘어갈 듯 외치던 그 음성이 65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쟁쟁하다.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의 시작이었다.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북한반장 중위였다. 토요일이던 6월 24일 나는 남한반 소속 서정순 중위 대신 당직 근무를 자원했다. 내가 줄곧 경계하고 걱정해온 그날이 코앞에 닥쳐왔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6·25 남침 6개월 전인 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은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했다. 북한 남침 준비상황을 소상히 파악해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였다. 작성을 지시·주도한 건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문관(文官)이었다. 그는 그해 4월 숙군(肅軍)으로 강제 예편돼 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1년2개월 만인 50년 6월 30일 소령으로 복직). 그가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 종합적인 적정보고서를 만들자”고 의견을 냈고, 나와 남한반장인 이영근 중위가 참여했다. 나는 북한의 군사 정보를, 이영근 중위는 남한에 침투한 무장공비 현황을 분석하고 박정희 문관이 종합판단을 했다. 이 판단서는 전란(戰亂) 중 소실됐지만 그 내용은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 요점을 옮기자면 이렇다.

 “적(敵)이 1950년 3월에 공격해올 것이 확실하다. 다만 중국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동북 한인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이 늦어진다면 침략 시점은 6월로 연기될 것이다.

적은 동두천·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 이상이 주공(主攻)을 지향할 것이다. 또 개성·파주·서울 선과 춘천·원주·평택 선엔 각각 1, 2개 사단이 조공(助攻)을 하게 된다. 함경북도에서 훈련 중인 유격 전문부대인 766부대는 배를 타고 후방에 투입될 것이다. 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텐데 총 병력은 최초 단계에서 약 12만, 서울 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으로 예상한다. 적의 전차부대는 아군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것이고 항공기는 지상군 엄호(掩護)를 주 임무로 삼을 것이다.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다.”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나는 38선 앞에 배치된 북한 3개 경비여단의 소대 현황까지 줄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 침공 경로에 대한 전략적인 판단에선 박정희 문관을 따라갈 수 없었다.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지켜본 그는 머리가 조직적이고 정밀했다. 박정희 문관은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여기 동두천·의정부 선이 주공이고 파주가 제1 조공, 춘천이 제 2조공”이라면서 화살표를 그리더니 “내 생각은 이런데 김 중위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가 말한 것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의견이 없었다.

 연말종합적정판단서는 육군 총참모장(지금의 참모총장)을 통해 국방장관과 미국 군사고문단장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채병덕 장군을 비롯한 우리 군 수뇌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채 장군은 오히려 “우리가 북진을 개시하면 일주일 안에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갈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윌리엄 로버트 미 고문단장은 6·25가 발발했을 때 여름 휴가를 맞아 미국으로 향하는 태평양 선상(船上)에 있었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 박정희 대위.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다. 동북의용군은 중공 측 사정으로 50년 5월에야 사리원(황해도)의 인민군 6사단에 편성됐다. 6월이 되자 심상찮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북한의 3개 경비여단이 후퇴하고 인민군 정규군이 38선 전역에 이동 배치되기 시작했다. 옹진·개성·포천·강릉 등 10곳의 정보국 파견대(OP)에서 활동하던 우리 측 정보요원들이 속속 남침 임박 징후를 알려왔다.

 6월 24일 오전 10시 나는 장도영 정보국장(대령, 훗날 육참총장)에게 “적의 공격이 임박한 걸로 판단됩니다. 일반 참모들을 소집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30분 뒤 강영훈 인사국장, 장창국 작전국장, 양국진 군수국장, 황헌친 고급부관과 장도영 국장이 상황실 원탁에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앞에서 “적이 기습을 한다면 내일 같은 일요일을 선택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브리핑했다. 이어 “즉시 전군에 비상태세를 취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전군의 외출을 중지시키고 외출한 장병은 부대로 복귀토록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참모들은 시큰둥했다. “무슨 확증이 있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야겠어”라며 한 사람이 일어서자 다른 참모들도 “나도 바빠서…”라면서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내 보고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토요일 근무가 끝난 용산 육군본부의 오후는 폭풍전야의 고요 같았다. 나는 각 파견대 대장들에게 한 시간마다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고급장교들은 장교구락부 준공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이날 38선 일대엔 호우가 내렸고, 밤이 깊어지자 서울에도 세찬 비가 쏟아졌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90년 6월 25일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앞줄 왼쪽)이 재향군인회가 주최한 6·25 40주년 기념 서울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그는 새로 맞춘 군복에 준장 계급장을 달았다. JP 오른쪽은 김성은 전 국방장관.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중앙포토]
 25일 새벽 3시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포천 파견대장이 ‘전차부대를 동반한 수 미상(未詳)의 적 대부대가 양문리 만세교 일대에서 공격해오고 있다’는 제1보를 보내왔다. 거의 동시에 7사단에서도 적의 포탄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나는 “왔구나.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적의 기습은 완전히 성공했다. 보병 6개 사단, 항공기 200대, 전차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의 북한 전력이 밀고 내려왔다. 아군에 비해 병력 2배, 항공력 200배, 전차 200배, 포화력 40배였다. 국군은 오전 7시에야 전군비상령을 내렸다. 비상소집에 육군본부 요원들이 집합 완료한 때가 오후 2시가 넘어서였으니 휘하 각 부대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육본의 어떤 참모는 집에 전화가 없어 헌병을 보내 그 집 근처에서 가두방송으로 찾아내기도 했다.

 아군의 저항은 거의 불가능했다. 인민군이 물밀 듯 남하했고, 사흘 만에 서울이 위태로워졌다. 27일 오전 9시 채병덕 총참모장이 나를 불러 밀봉한 봉투를 전했다. “창동 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편지를 전하고 해답을 받아오라”는 지시였다. 서울 도봉구 창동(당시 경기도 양주군) 전선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겠는지 묻는 편지였다. 나는 지프로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포탄이 떨어지면서 논바닥 진흙이 튀어 내 옷에 달라붙었다. “에이, (포탄이) 나를 죽일 거면 내 머리에 정통으로 떨어져라”고 소리치면서 차를 몰았다. 적군에 밀려 내려온 국군 장병들은 몽유병 환자와 같은 모습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7사단은 무너지고 있었고 유재흥 사단장은 찾을 수 없었다.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났더니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릉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연락장교단장 이용문 대령 역시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릉 북쪽 산허리엔 이미 인민군이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넘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육본에 돌아와 채병덕 장군에게 보고 들은 전황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는 “알았네”라며 주머니에서 미제 러키스트라이크 담뱃갑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의 손이 마구 떨리면서 담배 한 개비가 그냥 밀려나왔다.

채병덕
 다급해진 군 수뇌부는 교육 중이던 육군사관학교 생도대를 전선에 투입했다. 계급장도 달지 않은 생도들이 적군과 맞서야 했다. 육사 8기 동기생 1300여 명 중 1등으로 졸업한 뒤 육사 교장 부관으로 일하던 이헌영 중위는 생도대를 이끌고 의정부 전투에 참전했다가 6월 27일 전사했다. 동기생 중 1등이던 그가 가장 먼저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6·25 반년 전부터 개전 사흘 뒤까지 내가 겪은 군 내부의 실상이다. 6·25는 적이 기습 남침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적을 알고서도 준비하지 않아 남침을 자초한 것이다. 6·25는 김일성의 오판이라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오판한 건 우리 군 수뇌부였다. 6·25 사흘에 배운 피의 교훈은 무비유환(無備有患), 준비하지 않으면 화(禍)를 당한다는 것이다.

◆육사 생도(生徒) 2기=1950년 6월 1일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육사 10기(생도 1기)의 다음 기수로 정식 입교했지만 교육 20여 일 만에 6·25전쟁을 맞아 곧바로 전투에 투입된 비운의 기수. 제식훈련·영점사격 등 기초 군사훈련만 받은 상태에서 26일 경기도 포천지구 등 최전선에 227명이 투입돼 85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생도들은 50년 8월 15일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돼 6주간 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정식 육사 기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 인물 소사전 유재흥(1921~2011)=일본 육사(55기)를 졸업, 일본 육군 대위로 근무하다가 해방 뒤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 대위로 임관했다. 4·19 이후 중장으로 예편했으나 5·16 뒤 중용돼 국방부 장관(71~73년)에 기용됐다. 그 후 석유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6·25전쟁 중인 50년 9월 2군단장으로 경북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3군단장 때인 51년 5월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대패했다. 밴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은 3군단을 해체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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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