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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 박정희에게 대든 JP…"삼촌, 이런 충신이 또 어디 있어요" 옆에 있던 아내도 울먹였다

1971년 4월 15일 춘천 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 참석한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와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치열한 선거전이 전개되던 시기여서 두 사람 표정에 긴장감이 배어 있다. 68년 정계 은퇴 뒤 박 대통령과 충돌했던 JP는 다시 돌아와 3선개헌안 통과와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이겼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8년 5월 있었던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세력인 6인방이 나를 무력화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

<6월 10일자 12, 13면 참조>

 김형욱을 앞세운 그들은 내가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전국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박 대통령은 나를 의심했다.

 6인방(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이후락·김형욱)의 행보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 대통령까지 솔직히 싫어졌다. 정치가 이런 것이었나, 아무리 정치가 기복이 심하다고 해도 신의(信義)만큼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래, 그럼 내가 아예 물러나주마’라는 오기가 났다. 내가 사라져버리면 그만 아닌가. 68년 5월 30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아내 박영옥과 함께 부산 해운대로 내려가버렸다.



[사진 한국일보 제공]
 사실 나는 67년 양대 선거가 끝나면 정계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향토예비군 창설 등 국가위기를 극복하는 일 때문에 정계은퇴를 미루다가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져 이 기회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다 버리고 나니 홀가분했다. 해운대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극동호텔(현재 파라다이스호텔 옆 팔레드시즈 콘도 자리)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막상 내가 그만두자 박 대통령이 당황했다. 자꾸 사람들을 내려보내 내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다. 가장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이 부산으로 내려와 “지금은 당의장이 사퇴할 때가 아니라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라며 만류했다. 이어 조시형 청와대 정무수석(훗날 농림장관)과 장경순 국회부의장, 김성진 공화당 중앙위의장, 정태성 의원 등 일고여덟 명이 차례로 해운대를 찾아왔다. 사퇴를 번복하라는 설득과 함께 ‘빨리 서울로 올라와서 만나자’는 박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내 지역구인 부여 지구당에 탈당계가 정식 접수된 뒤에 귀경해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바둑으로 소일했다. 그때 내가 선글라스를 낀 채 구태회 의원(현 LS전선 명예회장)과 바둑 두는 모습이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옆에 있을 땐 골치 아파하더니, 없어지자 나를 붙들려고 했다. 권좌를 지키려는 최고 권력자의 심리란 그런 것인가 싶었다.

 6월 3일 내가 보낸 탈당계가 정식으로 접수돼 당적(黨籍)이 지워지고 국회의원 사퇴 절차가 마무리됐음을 확인했다. 당시는 탈당을 하면 국회의원직도 자동으로 박탈됐다. 그날 저녁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아내와 함께 청와대로 향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는 박 대통령과 일대일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대뜸 소리 지르듯 말했다.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지독한 견제와 감시에 시달려왔던 내가 참다 참다 토해낸 한마디였다. 이집트 혁명(1952년) 뒤 1인자인 나기브를 치고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의 이야기를 끌어왔다. 박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과 그동안 당한 것에 대한 설움이 그 말 안에 응축돼 있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에게 덤벼든 순간이었다.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의 개헌 발언을 톱기사로 보도한 1969년 1월 7일자 중앙일보 1면.
 처음에 대통령은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되물었다. 나는 “애급(埃及·이집트)에서 나기브 장군을 앞세워 혁명해놓고, 나중에 나기브 대통령을 밀어내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나세르 아닙니까. 제가 그런 사람인 줄 아십니까”라고 했다. 그제야 박 대통령이 내 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간격을 둔 뒤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허탈과 실망이 밀려왔다. 대통령의 대답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었다. 하나는 ‘네가 나세르처럼 그럴 수(나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니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할 수(견제하고 경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뜻이다.

 이어서 박 대통령 내외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아내 박영옥이 삼촌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같은 충신이 또 있는 줄 아세요?”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여간해선 의견을 얘기하지 않던 아내지만 꾹꾹 눌러 담아왔던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못 들은 척하고 묵묵히 밥만 먹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인내다.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인내야말로 인생의 덕(德)이란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68년 6월 5일 나는 당의장 이취임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의 후임으로는 중도파로 분류되던 윤치영(전 내무부 장관)이 당의장 서리로 취임했다. 김성곤 재정위원장을 필두로 한 공화당 4인체제(백남억·김진만·길재호)는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야인(野人)으로 돌아온 나는 캔버스를 메고 그림을 그리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사라지자 6인방은 거칠 것이 없었다. 68년 말이 되자 박 대통령의 3연임을 위한 개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62년 12월 국민투표로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한 차례만 중임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하버드대 루퍼트 에머슨 교수에게 자문해 미국 헌법의 권력구조를 따라 만든 것이다. 6인방은 이 중임 제한 조항을 폐지하자는 논의에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1972년 1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김종필 국무총리 부부(오른쪽은 작고한 박영옥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3선 임기 시작을 앞둔 71년 6월 JP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45세 나이로 총리에 오른 JP는 75년 12월까지 4년6개월간 재임했다. [중앙포토]
 정계를 떠나기 전부터 나는 이런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박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혁명 초기엔 몇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하셨던 분이 두 번 대통령에 당선되고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한 6인방은 이를 십분 이용해 자신들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들이 “각하가 아니면 안됩니다”라며 나서서 추진한 것이 3선개헌(三選改憲)이었다.

 한 해 전인 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그때 이미 야당 유세장에서는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당의장이었던 나는 기자들의 질문에 “공화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다고 해도 개헌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게 내 소신이었다.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129석을 차지해 개헌 선인 117석(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을 넘겼다.

 당의장을 그만둔 이듬해 69년 1월, 나는 제주도에 머물면서 감귤농원 조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가 1월 7일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계속 발휘해 민족 중흥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을 포함해 현행 헌법상에 문제가 있다면 검토·연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3선개헌 논의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어 1월 10일 박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현행 헌법에 부분적으로 고쳐야 할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는다”는 모호한 입장을 밝혔다. 개헌 문제로 공화당 내부는 물론 정치권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공화당 4인체제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68년 12월 정보부 삼청동 안가에서 당정 연석회의를 열어 3선개헌을 추진키로 각본을 다 짠 뒤였다. 6인방은 자신들이 앞장서 3선개헌을 주장하고 나오면 반대에 부닥쳐 꺾일 수 있다고 보고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를 앞세운 것이다. 그 내막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이거 야단 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윤치영(1898~1996)=정부 수립 후 초대 내무부 장관. 일본 와세다대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가했고, 미국에서 이승만의 비서로서 독립운동을 했다. 제헌·2·3·6·7대 국회의원과 제헌·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63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고 두 차례 당의장(서리 포함)을 맡았다. 63~66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했다. 82년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가 됐지만 1940년대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이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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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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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