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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개혁한 ‘맨발의 성녀’ 고행 … 500년 시간 넘어 생생

데레사 수녀가 활동한 스페인의 아빌라. 중세 시대의 성곽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앙포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의 유해가 모셔진 알바 데 토로메스 수도원의 성당. 실제 상당한 미인이었다는 데레사 수녀의 동상 오른쪽에 제대가 보인다. 십자가 위의 창살 안에 유해를 모신 관이 있고, 그 위에는 성녀의 왼팔을 담은 유리관(왼쪽 작은 사진)과 심장을 담은 유리관이 보인다. [사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6~14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스페인 순례를 갔다. 그곳은 가톨릭 영성가로 손꼽히는 아빌라의 대(大)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그리고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의 숨결이 흐르는 땅이다. 지난해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도 예수회 출신이다. 더구나 올해는 데레사 수녀의 탄생 500주년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스페인은 한마디로 영성의 순례지다.


 1515년 데레사 수녀는 유대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8세에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을 읽고서 크게 회심했다. 자서전에다 “그때까지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적을 정도였다.

 13~14세기 중세의 수도원은 ‘설립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귀족의 자녀들은 수도자가 될 때 상당한 지참금을 냈고, 세속에서 거느리던 하인들까지 데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했다. 청빈과는 거리가 멀었다. 16세기 아빌라의 대 데레사 수녀는 여기에 맞서 수도원 개혁에 시동을 걸었던 인물이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당대에 여성으로선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8일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 떨어진 아빌라로 갔다. 2400m나 되는 고성(古城)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세 도시였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대 데레사 수녀의 생가를 찾았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중세에 여성의 몸으로 사회적 권력이 집중됐던 당시의 수도원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었을까.

 데레사 수녀의 생가는 박물관이 돼 있었다. 거기서 맨발의 가르멜회 다니엘 데 파블로 마로토 신부(살라망카 신학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50년째 ‘아빌라의 데레사’를 연구 중이다.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던 데레사 수녀는 교회 내부의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개혁 성향의 ‘맨발의 가르멜회’를 세웠다. 그들은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녔다. 그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내맡기는 걸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맨발의 가르멜회는 봉쇄수도원이다. 입회하면 죽을 때까지 수도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묵상과 노동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영성을 일굴 뿐이다. 그렇다고 데레사 수녀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산 건 아니다. 오히려 영성을 통한 깊은 통찰력으로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하며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과 보수파 세력에 맞서 싸웠다. 그는 스페인 전역을 돌면서 개혁적인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생가에서 나왔다. 한참 걸어서 데레사 수녀가 살았던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으로 갔다. 데레사 수녀는 영성의 단계를 종종 일곱 개의 궁방(宮房·궁성의 방)에 비유했다. 수도원 뜰에는 일곱 개의 큼지막한 원이 그려져 있었다. 한복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다. 신비주의 영성가였던 데레사 수녀는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한 점도 남김 없이 자신을 던져본 이, 그 자리에서 신의 현존을 체험한 이만 쏟아낼 수 있는 ‘오도송(悟道頌)’이기도 하다.

 수도원에는 데레사 수녀가 살았던 자취가 남아 있었다. 당시 썼던 화로와 의자, 고해성사를 봤던 공간 등이 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거기서 마주친 그림 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수도원 계단에서 데레사 수녀와 꼬마 아이가 만나는 장면이다. 아이가 먼저 물었다. “너는 누구니?” 데레사 수녀가 답했다. “나는 예수의 데레사다. 너는 누구니?” 그러자 아이가 답했다. “나는 데레사의 예수다.” 데레사 수녀가 어린 예수를 만난 이 일화는 지금도 수도원에 전승되고 있다. 그건 일곱 궁방을 모두 지나 ‘데레사의 예수’와 ‘예수의 데레사’, 둘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는 일치의 순간에 대한 노래이기도 하다.

 수도원을 나섰다. 궁금했다. 데레사 수녀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버스를 타고 살라망카 지역을 지나 성녀의 유해가 있는 알바 데 토로메스 수도원의 성당으로 갔다. 제대 위쪽에 성녀의 심장과 왼팔이 썩지 않은 채 유리관 속에 보관돼 있었다. 그 밑에는 유해를 누인 관이 있었다.

 유해가 보이는 제대(祭臺)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데레사 수녀가 생전에 올렸던 기도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신은 결코 변함이 없다. 신을 품은 자는 부족함이 없다. 신은 스스로 전체를 채우니까.” 데레사 수녀는 그런 신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냄비들 가운데서도 현존해 계신다”며 자신의 부엌, 자신의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했다.

 성당에는 데레사 수녀의 임종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 67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 그의 유언은 이랬다.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 그건 신의 거함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열고 살았던 사람의 마지막 고백이기도 했다. 성당을 나서며 생각했다. 우리는 진정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딸일까.

  아빌라(스페인)=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아빌라의 대 데레사 수녀=1515년 스페인 아빌라 출생. 종교개혁의 와중에 엄격한 수도 규율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원 개혁을 성공시킨 가톨릭 영성가. 1617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성인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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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