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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가 날 제쳐놓고 뭘 한다며?” 박정희, 김형욱 허위 보고에 2인자 의심…“전 변심 안 했습니다” 공직 내던진 JP…“김형욱 회고록은 엉터리투성이”

6대 대선 날인 1967년 5월 3일 밤, 공화당사에서 개표 진행 상황을 지켜보는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김종필 당 의장. 초반부터 큰 표 차로 앞서가자 두 사람의 표정이 밝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시소게임이 아니어서 기자들이 별 재미가 없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박 대통령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16만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다. 박 대통령의 왼쪽 뒤편은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중앙포토]

5·16혁명 후 3~4년이 지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경험이 생기면서 권력 운용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는 1963년 10월 대선 때 민주공화당의 힘으로 당선됐지만 그 뒤 권력의 중심을 행정부나 청와대 비서실, 중앙정보부 등으로 분산·이동시켰다. 정치 하는 공화당엔 입들이 많고 소신으로 무장된 신진 정치인들이 박 대통령에게 바른 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말 잘 듣는 행정부와 시키면 군소리 없이 일을 해치우는 중앙정보부, 청와대 비서실에 힘을 실어줬다. 이 같은 권력 이동과 함께 박 대통령은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 이른바 분할해서 통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권력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경쟁·감시하게 만들어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게 하는 용인술이다.

 박 대통령이 김형욱에게 “JP가 왜 그렇게 당신을 미워하나. 당신을 갈아 치우라고 하던데”라고 하면 김형욱은 ‘아니, 지가 뭔데 나를 미워해. 어디 두고 보자’라면서 나한테 앙심을 품게 된다. 그 다음엔 김형욱이 나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박 대통령한테 내 문제를 조작해 만들어 보고하는 식이다. 전부 그렇게 떼어놔 각자가 수직으로 대통령을 받들게 하는 것이다. 밑에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통령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고려했을 것이다.

 65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은 나를 당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당내엔 김성곤이 이끄는 4인 체제(백남억·김진만·길재호)가, 당 밖에선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협조와 경쟁을 반복하면서 유독 나를 상대로 ‘반(反)JP 공동전선’을 폈다. 친위부대 6인방은 나를 제거하면 권력의 2인자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도 6인방이 지어낸 말들로 나를 견제하곤 했다.



1967년 7월 8일 ‘동백림 간첩단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68년 5월 내가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포기하게 된 이른바 ‘한국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도 6인방의 공동전선, 특히 김형욱의 음모와 협박·강압으로 꾸며진 것이다. 김형욱은 생전에 미국에서 구술한 『김형욱 회고록』이란 책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불러 “요새 (김종필의 측근 의원인) 김용태가 회장이 되어 공화당 안에 무슨 복지회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데 이건 암암리에 종필이를 71년 대통령 선거에 추대하기 위한 공작이라는 거야”라며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김형욱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용태가 국민복지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고 그가 ‘박정희 3선 개헌 공작을 저지해야 하며 71년 대선에서 우리의 대안은 오직 김종필 당의장이다’라는 시국판단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국판단서를 읽는 것을 목격한 증인까지 확보했다고도 꾸며댔다.

 그런데 나는 복지회니 뭐니 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시국판단서라는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박 대통령의 제보로 조사했다고 썼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김형욱이 정보의 수집·조사·판단 기능을 독점한 정보부 조직과 자금, 고문(拷問) 등을 이용해 먼저 일을 꾸며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다. 자기들이 문제를 조작한 뒤 대통령으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일이 틀어져 내가 무섭게 반발하면 박 대통령 핑계를 대고 발뺌하기 위해 ‘대통령 제보’를 들먹인 것이다. 국민복지회라는 이름 빼고는 모두 거짓이나 과장이었다. 김형욱의 회고라는 건 이처럼 엉터리투성이다.

 69년 초 일본 도쿄에 잠시 나가 있던 내가 이병철 삼성회장을 만나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고, 이 회장이 귀국해 이 얘기를 박 대통령에게 일렀다는 스토리도 김형욱이 자기 회고록에서 그럴듯하게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67년 여름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사건’도 김형욱이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한 건 해보겠다는 심보로 부풀려서 저지른 일이었다. 서독에 유학하거나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수십 명을 서울로 강제 송환해 엄청난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다. 박 대통령은 김형욱이 좋게 만든 보고만 받아 그게 전부인 것으로만 알고 계셨다.

 다시 68년 복지회 사건으로 가보자. 5월17, 18일 나는 연 이틀 청와대에 들어갔다. 첫날 박 대통령은 “김형욱이 갖고 온 건데 이거 대체 뭐요”라면서 이른바 ‘국민복지회’ 조사보고서를 건네줬다. 나는 읽어보고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알아보겠다고 하고 나와서 김용태를 만났다. 김 의원은 “저희들끼리 모여 국민복지회란 친목단체를 만든 건 사실인데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요다음 대통령은 아무개다,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그게 무슨 대통령을 옹립을 위한 조직입니까. 김형욱이 다 소설 쓴 겁니다.”

1962년 7월 김포공항에서 김종필 중 정 부장(왼쪽)이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김형욱 최고회의 위원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육사8기 동기생인 김형욱은 초기엔 JP의 호위병을 자처했지만 정보부장으로 올라선 뒤엔 JP 견제와 감시에 앞장선다. [사진 국가기록원]
 이튿날 박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제가 알아봤더니 픽션입니다”라고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수긍하지 않았다. “아니야, 그건 임자가 모르는 거야. 전국적으로 조직을 해가지고 71년 선거에서 날 제쳐놓고 임자가 뭘 한다며?”라고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시간을 좀 뒀다가 대답했다. “제가 만일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각하께 먼저 얘기했을 겁니다. 그러나 전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각하를 뒤에서 도와드리기로 했고 그렇게 일을 꾸미고 기구(중앙정보부, 민주공화당)도 만들어 투신해 왔습니다. 거기서 한 발짝도 열외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김 아무개(형욱)한테 잘못된 보고를 듣고 각하께서 심통(心痛)하시게 됐다면 그것은 제 부덕의 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전 변심 안 했습니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습니다.”

 청와대를 나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당시 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재선만 가능했으므로 박 대통령은 71년 대선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성곤·김형욱·이후락 등 친위부대 6인방 사이에선 3선 개헌 뒤 박 대통령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한 해 전 선거(67년 5월 대선, 6월 총선)만 끝나면 공화당 의장을 그만두려고 했다. 사임의 기회를 잡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에 대통령의 의심을 받게 되니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이제 떠나자. 혁명가로서 두 차례 대선과 총선을 통해 국민한테 박정희 대통령, 공화당 정부의 정통성을 공인받았으니 내가 할 일은 다했다’. 결심을 굳히고 정계은퇴 수순을 밟았다. 5월 25일 긴급 의원총회를 주재해 복지회 사건 관련자인 김용태 의원과 최영두 전 의원, 송상남 당원 3명을 해당행위자로 제명했다.

 5월 30일 당무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내 인생에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 합니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쉬고 싶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의장, 국회의원, 공화당 당적 같은 정치적 지위뿐 아니라 보이스카우트 총재, 동상건립위원장, 기능올림픽위원장, 5·16민족상 이사장 등 모든 비정치적 공직까지 내던졌다. 아무리 좋은 건의를 해도 올바른 국가정책 목표를 세워도 악의적으로 각색되고, 나의 모든 언행이 71년 대선 고지를 향한 것처럼 조작돼 박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현실에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형욱은 나의 청구동 집 네 귀퉁이에 정보부 요원들과 검은 지프를 세워놓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통제했다.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조사해 나를 고립화·무력화시키려 했다. 사실상 나를 연금했다. 백주대낮에 이런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김형욱한테 “야, 임마 이렇게까지 하기냐. 이건 네 발상이냐?”라고 쏘아붙였더니 “내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나. (박 대통령한테) 지시를 받았으니까 하지”라고 대답했다.

 공직 사퇴선언 때 동아일보 김진배(후에 11, 15대 국회의원) 기자가 나에게 "공화당은 군정하에서 사전 불법 조직이란 욕까지 들어가며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만든 정당인데 어떻게 탈당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목수가 자기가 살려고 집을 짓는 건 아니지 않으냐”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정치가 허업(虛業)이란 말을 내가 했지만 목수가 집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김용태(1926~2005)=5·16 주체세력 중 유일한 민간인으로, 거사 자금 조달책을 맡았다. JP와 서울 사대 동창으로 충남 출신(대전)이다. 중앙정보부장·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을 거쳐 공화당 창당 멤버가 됐다. 68년 ‘국민복지회사건’으로 당에서 제명됐지만 이듬해 복당했다. 6대부터 10대까지 내리 5선 의원을 지냈다. 공화당 원내총무를 두 차례 지냈고, 제1무임소장관을 역임했다. 별명은 ‘두목’. 80년 신군부 등장으로 정치 규제에 묶였다가 87년 JP가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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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