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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과잉’ 매뉴얼 사회, 무 매뉴얼 사회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도쿄 특파원 시절 어렵게 익힌 일본어를 잊지 않으려 새롭게 시작한 습관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내려받은 일본 라디오 프로그램을 출퇴근길에 듣고 있다. TBS의 인기 남성 아나운서 아즈미 신이치로가 진행하는 ‘일요천국’이란 프로그램이다. 들리든 안 들리든 무턱대고, 이를 악물고 듣고 있다. 최근 여기서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린이에게 함부로 말을 걸면 수상한 아저씨로 몰리는 희한한 세상이다. ‘정면에서 나타나 말을 걸어선 안 되지만 뒤에서 다가와 멈추지 않고 옆으로 지나가며 말을 걸면 괜찮다’는 매뉴얼도 있지 않나. ‘집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냐’는 질문은 안 되지만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은 괜찮다더라. 그래서 나는 ‘어디 사니’ ‘학교는 재미있니’라고 묻지 않고 ‘아저씨는 저 아파트에 살아’ ‘난 일하기가 너무 지겹고 싫어’라고 말하곤 한다, 하하하-.”

 아즈미 아나운서가 소개한 ‘유괴범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어른들이 동네 어린이를 대하는 매뉴얼’이다. 일상 속의 작은 이야기에 톡 쏘는 재미를 가미하는 그의 화법이 조금 과장스럽긴 해도 이런 매뉴얼의 존재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역시 매뉴얼의 나라다.

 서울 생활 3년째인 일본 유력 신문의 여성 특파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흥미롭다. 초등학생 자녀가 서울시내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학부모인 그는 지난 4월 말 학교에서 이런 통지문을 받았다. “지난 주말 독감으로 인한 결석자가 생겼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학교 버스를 탈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하도록 부탁드립니다.” 독감 환자 한 명 때문에 전교생에게 발령된 학교 버스 내 마스크 착용 지시 역시 매뉴얼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독감 환자가 0명이 됐으니 이제는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습니다”는 해제 통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20일이 지난 뒤였다.

 매뉴얼 의존도가 절대적인 일본 사회, “상세한 사용설명서가 없는 아이폰이 처음 출시됐을 때 일본 열도가 패닉에 빠졌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건 오버다” 싶은 일본의 매뉴얼들 못지않게 현충일에 발송된 국민안전처의 ‘메르스 긴급재난문자’ 역시 필자를 놀라게 했다.

 확진 환자 발생 17일째 만에야 ‘긴급’문자가 발송됐다는 사실에 놀랐고, ‘긴급’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 때문에 놀랐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을 증명하려는 듯한 초강력 경고음 때문에 놀랐다.

 메르스 발생 이후 한국 사회의 대혼란을 목격한 일본 언론의 서울 특파원은 “일본의 과잉 매뉴얼이 비정상인지, 한국의 무(無) 매뉴얼이 비정상인지 모르겠다”며 ‘다분히 외교적인’ 소감을 말했다. 정부와 각을 세운 서울시장은 “늑장 대응보다 과잉 대응이 낫다”고 했다는데, 과잉 매뉴얼의 속박과 무 매뉴얼의 혼란 중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려는지. 세월호 사고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매뉴얼 강조 열풍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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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