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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다시 도진 ‘후진국 트라우마’

양선희
논설위원
“알고 보니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어.” 지난 주말 전화를 해온 친구의 첫마디였다. 국민안전처의 메르스 예방수칙 ‘긴급재난문자’에 열 받아 한 전화였다. “2주도 넘게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이제야 ‘긴급’이란다. 뒷북행정도 행정이라고 하면서 창피함을 모르니 한심하고 부끄럽다.”

 비슷한 시각, 한 TV 뉴스 프로그램에선 메르스 첫 환자의 부인으로 역시 발병했던 2번 환자의 인터뷰가 나왔다. “온 국민한테 죄송하고, 이대로 한국에 살 수 있을까 싶고, 병원마다 폐렴이라고 하더니… 후진국도 이런 후진국이….”

 ‘메르스 후진국’. 요즘 우리를 가장 뼈아프게 한 말일 거다. 안이한 보건 당국이 1번 환자 한 명을 놓치는 바람에 사람 간 전염이 잘 안 되는 질병이 산지사방으로 번진 게 메르스 사태의 전말이다. 이는 10여 년 전 중국·홍콩에서만 650여 명이 사망한 사스 창궐 당시 철통방역으로 ‘방역 선진국’ 칭송을 받으며 드높아졌던 자존심을 한 방에 무너뜨렸다. 메르스 발생 20여 일이 지나며 병 자체에 대한 공포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분노와 허탈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은 메르스가 우리의 ‘후진국 트라우마’를 대놓고 끌어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후진국인가. 아니다. 온갖 지표를 다 들이대도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경제적 기준으론 세계 10대 선진국에 속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실질국민소득·교육수준·문맹률 등 삶의 지표를 통합해 조사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로 봐도 세계 15위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고소득 회원국, 국제통화기금(IMF)이 분류한 선진경제국 등 국제기구들의 분류에서도 상위권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선진국이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선진국이라는 자신감이 없다. 사회시스템·시민의식·정치수준 같은 지표화하기 어려운 질적 자산에 대한 자신감이 낮아서다. 그러던 차에 이번 메르스 사태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제대로 ‘인증’했다. 한국인 환자 입국으로 발칵 뒤집어진 중국도 아직 2차 감염 소식이 없는데 우리만 3차 감염 2차 유행의 물결이다.

 보통 후진국의 특징으론 불투명성·폐쇄주의·권위주의와 낮은 시민의식 등이 꼽힌다. 반면 선진국의 특징은 개방성·자율성·협력 등이다. 한데 메르스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사회시스템은 후진국의 그것이었다. 어느 병원에서 발생했는지도 몰라 환자들이 계속 그 병원을 드나들어 감염자가 확산됐고, 보건 당국은 무능의 끝판왕에다 폐쇄주의로 문제를 키웠다. 뒤늦게 병원명을 공개한 후 청와대는 ‘대통령 지시’라며 생색을 내는 어이없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자행했다. 게다가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질병을 통제하고 시민의 협력을 끌어내는 데는 미치지 못했고,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부추기는 데에나 작용했다.

 재난 와중에도 싸움박질에 몰두한 정치권의 이기심은 말하면 입만 아프고, 감염 의심자들도 골프장에 가고 해외 출장을 가는 ‘제멋대로 시민의식’이 만연했다. 리더십도 없고 시민의식도 낮은 나라가 어찌 후진국이 아니라고 항변하겠는가. 경제적 지표는 선진국을 가리켜도 우리 스스로 선진국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선진사회의 조건을 다룬 칼럼·논문·책 등을 뒤졌다. 다양한 견해들은 결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 ‘도덕성의 수준’. “경제적 부유함, 민주화 등 선진국의 외양을 갖추었어도 도덕적으로 우수한 사회를 이룰 수 있어야 선진사회다.”(김경동, 『선진한국 과연 실패작인가』, 삼성경제연구소) ‘도덕성 회복’이 선진사회로 가는 열쇠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을 시민이 선택하는 민주사회에선 정치와 정부의 수준도 사회와 시민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후진사회로 퇴행하며 리더십을 기대할 길 없는 지금 유일한 대안은 시민사회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되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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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