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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한잔하고 가라던 이주일씨 … 손편지 시절엔 이런 낭만 있었죠

34년 집배원 임명래씨
 
강남우체국 집배원 임명래씨가 편지 배달할 때 사용하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오늘도 이 오토바이를 타고 강남구 역삼 1·2동에 편지와 소포를 배달한다. [김경록 기자]

“편지 왔습니다~.” 집배원 임명래(58)씨는 오늘도 수백 통의 편지를 안고 빨간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그는 34년 동안 편지와 소포를 배달했다. 1981년부터 남서울우체국(현 관악우체국)에서 임시직으로 3년을 일한 뒤 84년부터 서울 강남구에서 31년째다. 임씨는 당일특급, 국제우편, 소포를 담당하는 특급팀에서 일한다. 특급 우편을 맡은 지는 28년째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이나 도망쳤어요. 그런데 내가 배달할 편지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 떠올리니까 이 일을 그만두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오매불망 자식 편지 기다리는 할머니, 밤새 설레며 연인 편지를 기다렸던 젊은 아가씨…. 그의 34년 집배원 인생에는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녹아 있다. 그는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도, 한파가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오토바이를 몰았다.

공무원이 최고였던 시골

임명래씨가 집배원이 된 건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릴 때는 공무원이 가장 힘 센 사람인 줄 알았어요.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보고, 오토바이를 타고, TV를 보는 사람이 공무원이었거든요.”

 그는 1957년 전북 순창군 갑동리 호계마을에서 태어났다. 호계마을은 임씨 집성촌으로 마을 규모 150가구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 자영농과 소작농을 겸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예부터 선비들이 많이 난 마을이었어요. 임씨 집성촌이다 보니까 항렬을 중요하게 따졌죠. 또래 친구라고 해도 촌수가 높으면 무조건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했어요. 안 그러면 마을 어르신들한테 회초리로 엄청 맞았거든요.” 그의 흐릿한 기억 속엔 하얗게 물든 앞산이 남아있다. 3월이면 시제를 지내기 위해 집안 어른들이 다 모였다. 선산이 18개나 됐다. 200여 명이 넘는 집안 어른들이 하얀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보름 동안이나 산을 올랐다. “산이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었어요.”

 선비들의 마을이었던 호계마을도 60~70년대 한국이 겪었던 급격한 근대화·산업화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초가집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도로가 넓어지고 하수도 시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 속에 군청 공무원의 힘은 막강했다. “도로를 넓히려면 논밭을 침범할 수밖에 없잖아요. 어른들이 조상이 남긴 땅이라며 땅을 안 뺏기려고 얼마나 싸우던지. 그래 봐야 소용 있나요. 군청 공무원이 나와서 측량하고 여기까지 넓혀야 한다고 딱 결정하면 그걸로 끝이었어요.”

 80년 군대를 제대하고 마을로 되돌아왔다. 부모님은 힘든 농사일은 자식들에겐 절대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을 청년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농사는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했다. 그는 공무원을 꿈꿨다. 81년 가을, 서울로 시집간 둘째 누나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3일 만에 도망친 집배원

서울로 상경한 그에게 고향 형님이 찾아왔다. 먼 사촌뻘 되는 동네 형이었다. 그 형은 “너한테 딱 맞는 직업이 있으니 무조건 따라와보라”고 했다. 무슨 직업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81년 가을, 그냥 믿고 따라나섰다. 도착해보니 남서울우체국(현 관악우체국)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집배원은 기피하는 직업이었어요. 공무원이라고 해도 박봉에 완전 봉사직이니까. 아마 그 형님이 제가 안 따라올까봐 안 알려줬던 것 같아요.” 겁이 났다. ‘힘들다던데…’ 그래도 고향 형님을 믿고 일단 해보기로 했다. 임시직이었다.

 3일 만에 도망쳤다. 예상대로 너무 힘들었다. 매일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시골 촌놈이라고 무시당할까봐 겁도 났다. 81년 당시엔 자전거도 지급되지 않았다. 무거운 우편 가방을 들쳐메고 신림동·봉천동 고갯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두 발만으로 올라야 했다. 하루에 수백 집을 돌아야 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집배원을 제안했던 동네 형은 다시 임씨를 찾았다. 추천한 내 체면이 있으니 일주일만 더 해보라고. 그 말을 따랐다. “형님 말씀대로 일주일 채웠으니 나 일 안 할라요.” 그런데 이번엔 남서울우체국 계장이 직접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한 달은 채우고 월급은 받아가라고 했다. 직접 찾아온 어른 체면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임씨는 다시 한 달을 채웠다.

 그때 임씨의 월급은 겨우 5만원이었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 겨우 살 돈이었다. 박봉도 박봉이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근무 환경이었다. 걸어서 달동네를 올라야 하는 일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문제는 신발이었다. 지금과 같은 기능성 운동화는 있지도 않았다. 군인이나 신는 워커화가 지급됐다. “제가 어릴 때부터 소도둑놈이라고 들을 정도로 발이 컸어요. 285㎜를 신는데, 발에 맞는 신발을 지급해주지를 않는 거예요. 제일 큰 게 270㎜였어요. 발에 맞지도 않는 그 딱딱한 워커화를 신고 하루 종일 걸어봐요.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한 달 새에 발톱이 5개나 빠졌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뻗어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걸 계속 해야 하나….’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또 고민했다.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자꾸 편지를 배달했던 동네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삼천포에서 올라왔다던 그 형님은 잘 계실까’ ‘아들 편지 기다리는 할머니는 어떡하지’ ‘그 선머슴 같은 놈 애인 편지 기다릴 텐데’ 그는 우편 가방을 다시 들쳐 멨다.
 
임명래씨는 우체국 안에서도 성실하기로 유명하다. 근면 성실함으로 34년 동안 수차례 표창장을 받았다.

동네 주민에게 녹아들다

임씨는 남서울우체국에서 꼬박 3년을 임시직으로 일했다. 박봉에, 고된 일에 시달려도 기분은 참 좋았다. 매일 술에 취해 퇴근했다. 그런데 그 술이 참 달콤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냥 가게 두지를 않아요. 밥 먹고 가라, 술 한잔하자, 누구 생일이라고 꼭 오라고 그렇게 저를 매일 찾았어요. 완전 마을 사람 다 된 거죠.” 편지를 배달하는 집마다 고생한다고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고 해서 그렇게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편지 배달 시간보다 동네 사람 수다 들어주고, 자식 자랑에 맞장구 쳐주는 시간이 더 길기도 했다. 한 할머니는 사위 삼고 싶다고 손녀딸 한번 만나보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할머니는 임씨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나와 매일 아들 편지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임씨는 “어느 순간 내가 그 사람들의 삶의 한복판에 함께 있게 됐다”고 표현했다. “못사는 동네다 보니까 글을 못 읽는 어른들이 많으셨어요. 편지를 읽어주고 대신 답장을 써 주는 일이 많았어요.” 임씨는 마을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다.

 한 번은 다리를 다쳐 일주일간 편지 배달을 못 한 적이 있었다. 마을에 난리가 났다. “우리 집배원 아저씨 어디 갔냐고, 어디가 아픈 거냐고 마을 사람들이 대신 나온 집배원을 붙들고 많이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코끝이 찡해졌어요.”

 그렇게 3년의 세월을 신림동·봉천동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러다 84년에 정규직으로 당시 영동우체국(현 강남우체국)으로 발령이 났다. 지금도 집배원은 공개 채용이 없다. 대부분 임시직으로 시작해 결원이 생기면 정규직으로 발령 나는 식이다. 그에겐 임시직을 벗어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기회였다. 신림동에 통장 긴급회의가 열렸다. 임씨를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민원을 넣겠다는 거다. 어떻게 떠나야 할지가 고민이 됐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1년 후에 꼭 돌아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강남으로 온 지 몇 년 후에 딱 걸려버렸다. 신림동에서 친하게 지냈던 누나가 수서동으로 이사 왔다. “편지 배달하다 마주쳤어요. 그 누님이 ‘동생 1년 후에 온다더니 왜 안 왔냐’고 하면서 오토바이 키를 빼앗고는 못 간다고 밥 먹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여덟 분이 더 모였어요. 밤새 웃고 떠들고, 오랜만에 즐겁게 술을 마셨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80년대엔 어르신 말벗·대필…동네서 없어선 안 될 존재
2000년대 들어 e메일·문자 대중화로 연하장도 자취 감춰
“편지 사라져도 거기 담긴 애틋함은 어디선가 이어지겠죠"

 
강남우체국 안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고 있는 임명래씨.

심형래 모친에게 얻어맞은 사연

강남우체국으로 오면서 일은 배 이상으로 늘었다. 오전 7시까지 출근해 우편물을 수작업으로 분류하고,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우편물을 배달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들어와 오후 중에 온 우편물 분류 작업을 또 했다. 집에 못 가고 우체국에서 자는 날도 많았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고된 일이 이어졌다. 하루에 배달해야 하는 우편물 수가 3000통이 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은 인원도 많이 늘고 10년 전쯤에 우편물 자동분류 기계가 들어와서 일이 많이 준 거예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편물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류했어요.”

주말도 없었다. 88년부터 당일특급, 국제우편, 소포를 담당하는 특급 배달 업무를 했다. 특급의 특성상 급한 우편이 많아 토·일을 쉬지 않고 일했다. 주말 휴일이 생긴 건 겨우 3년 전부터라고 한다. 1년에 열흘 정도밖에 못 쉬는 해가 25년이나 이어졌다. 교통사고도 수차례 당했다. 우편배달하다 사나운 개한테 물려본 적도 여러 번이다. “개 피하려고 자동차 위로 올라간 적도 두 번이나 있다니까요.”

 그는 그렇게 30년 동안 강남 곳곳을 누볐다. 그의 기억 속엔 강남 개발의 30년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압구정동·논현동·청담동 등 양재천을 기준으로 그 위쪽만 개발됐지 양재천 밑의 세곡동·수서동·일원동은 정말 완전 시골이었어요.” 비가 오면 자전거에 흙이 끼어 긴 꼬챙이로 흙을 다 파내고서야 배달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80~90년대 강남 투기 열풍이 불면서 안타까운 모습도 많이 봤다. “80년대 중반에 영동시장에서 양재동 말죽거리까지 수 ㎞에 걸쳐서 술집이 엄청 들어섰어요. 하루가 다르게 땅값이 올라가니까 땅 팔아 흥청망청 술에 탕진한 사람이 많았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고(故) 이주일씨를 꼽았다. “한번은 이주일 선생님 집에 우편을 배달했는데 들어와서 술 한잔하고 가시라면서 비싼 양주를 내어주더라고요. 그분 참 술 좋아하셨어요.” 해프닝도 많았다. 코미디언 심형래씨 어머니께 빗자루로 두드려 맞기도 했다. “그때 심형래씨가 코미디언으로 최고 인기를 누릴 때였거든요. 우편을 배달하려고 벨을 눌렀는데, 심형래씨 어머니가 다짜고짜 빗자루로 두드려 패더라고요. 알고 보니 동네 애들이 날마다 심형래씨 집 벨을 누르고 도망치면서 ‘영구 없다’ 하면서 장난을 쳤던 거예요. 어머니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제가 다 민망할 정도였어요. 하하.”

 2000년대 초엔 국제우편이 급증했다. 조기유학이 늘어나면서다. 열에 한 집꼴로 국제우편이 배달될 정도였다. “캐나다가 가장 많았어요. 그다음으로 미국·뉴질랜드·영국순으로 많았고요.” 2010년대 들어서는 해외 직구 소포가 늘었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꾸준한 건 군대 편지다. “편지 봉투에 번호를 매겨서 보내는 연인들이 많았는데, 제가 본 최고 기록이 256번째 편지까지 보낸 커플이었어요.”
 

‘하늘에 계신 아빠께’ 아이 편지에 답장도

임씨는 내년이면 정년 퇴임을 한다. 34년 집배원 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집배원을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에게도 요즘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편지가 부쩍 줄어든 것이다. 2000년대 초부터 인터넷이 발달하고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면서 손글씨로 쓴 편지는 줄었다. e메일과 문자 서비스가 편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1년을 마감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던 연하장도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개포동에 살았던 한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편지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고 소개했다. 2003년의 일이다. 개포동의 우체통을 수거하던 중 ‘하늘에 계신 아빠께’라고 적힌 우표가 없는 편지를 발견했다. 매주 편지가 이어졌다. 집배원 사이에 그 아이의 편지가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뜻을 모았다. 6개월 정도 그 아이의 편지에 답장을 써준 거다. “그렇게 6개월을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편지가 끊겼죠. 이사를 한 건지 다른 일이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어디선가에선 또 이어지고 있을 거예요.” 편지는 사라져가지만 편지에 담았던 애틋함은 사라지지 않을 거다. “앞으로 인터넷 기술이 더 발전하면 집배원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사람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집배원의 역할이 어딘가에선 분명히 또 필요할 거예요.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고 생각해요.”

글=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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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