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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공간의 자유, 심리의 자유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헨리 앤드 파트너스 비자 제한 지수(Henry & Partners Visa Restriction Index)’란 게 있다. 국가별로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나라 수를 가리키는 지수다. 비자면제협정에 따라 비자가 아예 필요 없거나 공항이나 항만, 또는 국경에서 발급받은 도착비자로 입국이 가능한 나라 수를 기준으로 산정한다. 여권(旅券)의 힘을 나타내는 지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패스포트 파워 지수’라고도 부른다.



 이 지수로 따져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 세계 172개국을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우리보다 여권의 힘이 센 나라는 미국·영국·핀란드·독일·스웨덴(174개국)과 캐나다·덴마크(173개국)뿐이다. 한국은 일본·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 8개국과 함께 세계 3위의 여권 파워를 자랑한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국민의 공간적 자유가 확대됐다는 의미다. 비자를 받기 위해 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고, 복잡한 서류를 제출하고, 비자 수수료를 지불하고, 마음 졸이며 결과를 기다려야 했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 묻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태극기를 불태운 한 청년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사건’이 지난주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집회에서 종이로 된 태극기를 불태운 김모(24)씨에 대해 경찰은 국기모독죄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형법 제105조는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를 손상·제거·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김씨가 집회 현장에서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우발적·충동적으로 국기 소훼(燒毁) 행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국가를 모욕할 의도를 갖고 한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한 게 아니듯 조국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부모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나도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뿐이다. 그런 나에게 태극기는 내가 속하고 지켜야 할 국가, 즉 대한민국의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흰 종이나 헝겊에 빨강과 파랑의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의 검은색 4궤를 그린 도형에 불과하다. 인격이나 신앙의 대상이 아닌 국기를 모독한다는 개념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1989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도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되는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라며 성조기 소각 행위를 처벌하는 텍사스주 법률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성조기를 훼손했다고 처벌하면 성조기가 상징하는 소중한 자유를 훼손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취지로 2009년 한국형사정책학회는 “국기모독죄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며 폐지하자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며칠 전 서울 종로 보신각과 홍대 인근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 수백 장이 뿌려졌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 명의로 살포된 종로 쪽 전단에는 ‘메르스보다 대통령이 더 무섭다’며 ‘책임지지 않는 정부, 국민들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 이게 나라냐’라는 문구가, 홍대 쪽 전단에는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과 함께 ‘메르스가 세월호’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이 등장한 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전국 여러 곳에서 살포됐다. 그때마다 경찰이 나서서 주동자를 색출하고, 압수수색을 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처벌 규정이 마땅치 않아 흐지부지됐다. 국가원수모독죄로 인식됐던 국가모독죄는 87년 민주화 이후 폐지됐다. 대통령은 절대왕정의 군주가 아니다. 5년간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임시직 국가원수일 뿐이다. 대통령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면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 살포도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그로 인해 대통령 개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면 명예훼손죄로 고발하면 그만이다. 공권력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많아져 공간적 자유가 확대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국기모독죄가 아직도 살아 있고,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공권력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공간적 자유보다 더 소중한 심리적 자유가 제약받는 것이다. 심리적 자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다. 국기는 국기일 뿐이고, 대통령은 대통령일 뿐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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