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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신종플루 이긴 방역당국, 방심하다 역습 자초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퍼지던 지난해 5월 15일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메르스의 특성과 예방수칙 준수 당부’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질병관리본부는 메르스의 국내 발생에 대비해 중앙방역대책반을 선제적으로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또 중동 지역 출입국자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고 입원치료 격리병상 가동태세를 상시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메르스 쇼크] 힘 못쓴 방역체계

하지만 1년 뒤 복지부의 이런 발표는 허언(虛言)으로 드러났다. 중동 여행 중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나 방역당국 담당자는 무지했고, 중앙대책반은 뒷북만 쳤다. 의심 환자가 중국으로 출국하는 사실을 모른 것은 물론 격리병상을 확보하지 못해 허둥대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중동 지역을 제외하면 메르스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국가가 됐다.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때나 2009년 신종플루(인플루엔자A/H1N1) 때는 잘 대처했다고 평가를 받았던 방역 당국이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전문가들은 “사스 등 몇 차례 방역 성공에서 나온 지나친 자신감, 발생 지역이 멀리 떨어진 중동이란 점에서 비롯된 방심, 서아프리카 에볼라와 발생시기가 겹치면서 나타난 집중력 분산 등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근본적으론 사스 사태 같은 상황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화(禍)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가까워진 중동 … 전파력 과소 평가
2013년 12월 과학잡지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논문에서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구팀은 “바이러스 전파로 볼 때 영국 국내 도시들보다 런던과 미국 뉴욕 사이가 훨씬 가까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실효거리(effective distance)’다. 두 지역의 거리가 멀어도 항공교통이 활발하게 오가고 이용객이 많으면 인근 지역 간보다 감염병 확산이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이재갑 교수는 “최근 중동에 한국인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왕래하는 사람이 증가했고, 중동 도시를 경유하는 여행자도 늘어 메르스가 국내로 유입될 가능성이 더 컸는데 에볼라보다 소홀히 여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메르스의 잠복기는 최대 2주일 정도로 알려져 있다. 바이러스에 노출된 이후 2주일까지도 뚜렷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사이 항공기를 타고 이동한다면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에볼라는 잠복기가 최대 21일, 사스도 최대 10일이다.

더욱이 공항에 설치된 열적외선 탐지기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차가 위아래(±)로 2도나 된다. 체온이 38도라도 36도로 측정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체내 카페인·니코틴·알코올 농도, 활동·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체온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질병관리본부도 처음부터 메르스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6월 메르스 대비 포럼을 개최하고, 9월 추석과 아시안게임 때까지도 메르스 국내 유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눈에 띄는 대응이 없었다. 지난해 7월 마련한 ‘메르스 대응지침’도 지난달 말에야 부랴부랴 개정했다.

선제적 정보 수집과 연구에 소홀
2003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의 프랑스병원에서 일하던 감염병 전문의 카를로 우르바니 박사는 비정형성 폐렴 사례를 발견하고 즉각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했다. 사스를 처음 보고한 것이다. 그는 WHO와 ‘국경 없는 의사회’에 도움을 요청해 사스 확산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사스나 메르스처럼 야생동물에게서 사람에게로 갑자기 옮겨 오는 바이러스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 브라운대 연구팀은 지난해 10월 “지난 30년간 발생한 1만2000종의 각종 감염성 질병의 65%는 동물에게서 나왔고, 이 가운데 56%가 전염병으로 확산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늘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바이러스는 발생 초기엔 어떤 특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대대적인 확산을 방기할 이유는 없다. 비슷한 종류의 바이러스를 참고해 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방역 전문가들은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말처럼 국내에 감염병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시민들에게 대처요령 등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제적 대응도 필요하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국제보건 담당 조직을 운영하면서 세계 60여 개국에 33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해외 질병을 탐지해 조기경보를 내린다. 하지만 국내 방역 당국은 선제적인 정보 수집이나 연구를 소홀히 한 탓에 이번 같은 메르스 사태를 맞게 됐다.

초동 대응 허술 … 골든타임 놓쳐
외래 전염병 발생 초기에는 어느 나라나 허둥댈 수밖에 없다. 중국도 2002년 11월 광둥(廣東)성에서 사스가 발생했으나 제대로 대처를 못해 홍콩·베트남·캐나다로 퍼져 나갔다. 2009년 신종플루 당시에도 멕시코의 경우 국세조사원이었던 여성이 ‘수퍼전파자(super-spreader)’였다. 사망 전에 수백 명과 접촉해 30여 명에게 병을 옮겼다. 중동 지역도 메르스로 혼란을 겪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만 2012년부터 지난해 5월 초까지 446명의 환자가 발생해 120명이 사망했다.

한국의 방역 당국이 비판을 받는 것은 메르스의 최초 발생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 중동 지역에 병이 발생해 3년 가까이 확산되면서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알려졌지만 막상 국내에 유입됐을 때는 처음 발생한 것처럼 허둥댔다.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선진국도 모두 잘 대처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메르스 대처에는 성공했지만 지난해 에볼라 때는 감염자를 치료하던 간호사가 감염돼 사망하는 등 방역에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2013년 2월 영국에서는 환자 가족이 메르스에 걸렸고, 프랑스에서도 2013년 5월 같은 병실을 사용했던 환자가 메르스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 한국처럼 환자가 50명이나 발생한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달 첫 환자가 발생하기 전까지 입국 승객에 대한 방송이나 안내문 배포 같은 조치에도 소홀했다. 위험 지역 여행자 전원을 2주간 추적 관리했던 사스 때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은 사스 때의 아픈 경험을 살려 2009년 신종플루 때에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성일 교수는 “위험 지역 국가 내에서 어느 도시를 거쳤는지 파악하기 위해 보고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지만 개인정보와 사생활 침해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체 안전과 개인 사생활 보호 사이에서 어느 정도까지 보고체계를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돌연변이 가능성 예의 주시해야
메르스 바이러스는 유전자가 단일 가닥 RNA(ssRNA)로 이뤄져 있다. DNA로 된 바이러스에 비해 돌연변이가 훨씬 쉽게 일어난다. 숙주세포에 들어와 RNA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염기(base)가 끼어 들어갈 확률이 1만분의 1에서 10만분의 1 수준이다. 사람의 DNA 복제 과정에 비해 돌연변이 발생 확률이 10만 배나 된다. 메르스 바이러스의 RNA는 3만 개의 염기가 한 줄로 이어져 있는데 세포에 침투해 복제된 바이러스에는 한 번 정도의 돌연변이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엉뚱한 염기가 RNA에 끼어 들어가면 나중에 다른 아미노산을 가진 변이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염력이 강해진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염력이 낮은 것으로 알려진 메르스가 한국에서만 유독 빠르게 확산되는 게 유전자 변이 탓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왔다. 바이러스 전문가 말릭 페이리스 홍콩대 교수는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빨리 나타난 것을 두고 일각에선 변이를 겪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단 일단 국내로 유입된 메르스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키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지만 이 바이러스의 특성상 언제 변이된 것이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질병관리본부 정규직 조사관 2~3명뿐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다. 수도권에만 전 인구의 절반 가까운 2000만 명이 몰려 산다. 이런 곳에 감염병이 퍼진다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는 에볼라 방역에 성공해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미국 CDC조차 전쟁에 휩싸인 나이지리아가 방역에 성공한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연구원을 파견했다. 인구 1억7000만 명의 나이지리아 정부는 첫 환자가 발생하자 즉각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 1, 2차 접촉자 894명을 중점 감시하고 지역 공무원 2만6000가구를 모니터링했다. 모니터링을 위해 전문인력이 방문한 횟수만 1만8500회나 됐다.

영국 가디언은 “2012년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소아마비 예방을 위해 지원한 긴급사태지원센터가 에볼라 비상운영센터로 변신해 훌륭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 재단은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것이다. 소아마비 대응팀 소속 의사 40명을 비상운영센터에 배치했고, WHO와 국경 없는 의사회, 미국 CDC 등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여기에 휴대전화와 인터넷,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까지 적극 활용했다.

그동안 사스나 신종플루처럼 감염병이 확산될 때마다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인력과 시설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동국대 의대 이관(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질병관리본부의 감염병 전담인력이 많지 않다”며 “정규직으로 있는 역학조사관은 2~3명뿐이고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과의 공중보건의를 모아 대책위를 만드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건양대 의대 홍지영(예방의학교실) 교수는 “격리병실 확충과 함께 시·도별로 재난 대비 전용 병원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며 “역학조사관이나 호흡기내과 전문의 등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찬수 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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