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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박정희와 대야에 발 담그고 함께 술 마셔

“국회의원은 뭐냐. 백수건달 아니면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오.”



60~70년대 정계 거물 김성곤
쌍용양회로 든든한 재력 쌓아
야당 의원 사이선 “협상의 명수”

 1958년 8월 국회 예결위에서 자유당 초선 의원이 발언권을 청하더니 굵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야 의원들이 뒤집어졌고 신문은 대서특필했다. 몇 날 며칠 말싸움을 이어가던 국회의원들에게 쓴소리한 이는 성곡 김성곤(이니셜 SK). 그가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첫 사건이었다.



 구 정치인 출신 SK는 63년 민주공화당에서 정치를 재개한 뒤 단숨에 실력자로 떠올랐다. 단순히 ‘4인체제’ 중 한 명이 아니라 리더였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재력이었다.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행정부에도 그에게 금전적으로 신세 진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단순히 돈을 좀 쓰는 수준이 아니라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은 “상대방이 100만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SK를 찾아오면 SK는 500만원이나 1000만원을 내줬다”며 “사람을 보는 안목과 승부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SK에겐 ‘배포가 크다’는 표현이 따라붙었다. 통 큰 행보로 그는 야당까지 휘어잡는 정치력을 지닌 거물 정치인이 된다.



‘협상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이종식 전 의원(9·10대)은 “협상을 할 때는 상대방을 술독에 집어넣든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기가 막히게 해냈다”고 말했다.



 그가 4인체제라는 독자적인 그룹을 이끈 건 박정희 대통령이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SK는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같이 양말 벗고 대야에 발 담근 채 술을 마시곤 했다. 사석에서는 박 대통령과 호형호제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는 박 대통령보다 네 살이 많다.



 SK의 장녀 김인숙 국민대 명예교수는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려대 출신 유학생만 보면 돈을 집어주고 돈이 없을 땐 시계도 풀어주던 분”이라며 “사람을 파악하고 베푸는 힘은 타고 나셨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64년 8월 미국 보스턴 자신의 신혼집에서 SK와 JP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결론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갈등이 깊어진다. 71년 10·2 항명파동으로 정계를 떠난 SK는 큰딸에게 “정치는 할 것이 못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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