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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속 색다름 추구한 열정의 삶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1906~1989)는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고도를 기다리며』는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쓰였다. 1막과 2막의 마지막 대사는 모두 동일하게 끝난다.

-자, 그럼 가 볼까?
-응, 가자.
(두 사람은 꿈쩍하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1막에서는 에스트라공이 가자는 말을 꺼내고, 2막에서는 블라디미르가 가자는 말을 꺼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하든 결과는 똑같다. 두 사람은 합의를 하고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어서 막이 내린다. 두 사람은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언제 오는지 모른다. 종종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의미를 향해 달리는 이야기지만,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후 베케트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그가 쓴 작품 제목들은 의미와 유의미,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간다.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떨어지는 모든 것들』『버려진 한 작품에서』『왔다 갔다』『죽은 상상력을 상상하라』『나는 아니야』『잘못 보이는 잘못 말해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친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베케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일종의 휴식 같은 행위였다. 그는 오랫동안 공들인 『몰로이』와 『말론 죽다』를 쓰는 동안 기분 전환으로 ‘고도’를 떠올렸다. “나는 산문(소설) 쓰기가 몰아넣은 끔찍한 우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희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삶이란 너무 지긋지긋해서 연극은 기분 전환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48년 10월 9일 시작돼 49년 1월 29일 탈고됐다. 하지만 바로 무대에 올려진 것은 아니다. 53년 1월 5일 바빌론 극장에서 비로소 초연됐다. 당시 아방가르드의 선두 주자 로제 블랭은 이 극의 연출뿐 아니라 ‘포조’라는 캐릭터의 역할도 맡았다. 이 작품은 바빌론 극장에서만 400회 이상 공연됐다. 그런데 정작 베케트는 마지막 리허설에 참여한 후 첫 공연도 보지 않은 채 파리 근교 우시(Ussy)의 시골집에 칩거한다.

1 사뮈엘 베케트의 1960년 사진 ⓒ OZKOK/SIPA/Rex/Evening Standard Ltd. 2 로열헤이마켓 극장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세트(2009) ⓒ wikipedia 3 사뮈엘 베케트의 영화 ‘필름’(1965)에 출연한 노년의 버스터 키튼 ⓒ www.voxsartoria.com
열정에 불 지핀 제임스 조이스와의 만남
이처럼 베케트의 삶에는 모순된 것들이 공존한다. 베케트에게 파리는 기회의 땅인 동시에 절망을 안겨 준 장소였다. 28년 파리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환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그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큰 흥미를 주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오후나 저녁 무렵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일랜드 문학의 대표적 인물인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면서 그의 열정은 비로소 피어난다. 눈병을 앓고 있던 조이스를 위해 그는 책을 읽어 주고, 대필을 하거나, 조이스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주는 등 비서 일을 2년간 자청했다. 그는 조이스의 문체, 말투, 여러 가지 몸가짐까지도 모방했다. 무엇보다 침묵을 배웠다. 출판업자나 연출가, 기자, 배우들과의 관계에서 비판당하거나 언쟁을 피할 수 없을 때, 혹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베케트는 침묵함으로써 문제를 피해 가거나 해결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을 작품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조이스 역시 베케트를 위해 비평문을 쓰고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엉뚱한 오해로 두 사람의 관계는 벌어지게 된다. 조이스의 딸 루시아는 베케트를 짝사랑했다가 거절당하자 심한 우울 상태에 빠지고, 조이스는 이 사태에 대한 충격으로 베케트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토머스 맥그리비는 조이스와의 결별 이후 낙담해 있는 베케트에게 ‘시 경연 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고한다. 대회 측으로부터 응시작들이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베케트를 떠올린 것이다. 때는 마감 전날이었다.
베케트는 맥그리비가 방을 나가자마자 시를 쓰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 무렵 르네 데카르트의 생애와 점성술을 연결한 98연의 시 ‘호로스코프’를 완성한다.

프랑스의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사무엘 베케트가 2년간 파리에서 연구하던 인물이었다. 주최 측은 베케트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기교에 감탄을 보내며 그것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부탁했고, 베케트는 20개의 주석을 붙여 출판하게 된다. 이것이 베케트 최초의 단독 출판물이었다. 이처럼 베케트의 선택과 경험은 ‘왔다 갔다’하는 삶의 부조리 속에 놓여 있다.

명성 얻은 뒤에도 다양한 실험 시도
부조리함을 살다 간 베케트의 이력은 다채롭다. 64년 베케트는 ‘필름’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연출하기 위해 찾아온 러시아의 거장 에이젠슈타인과 만난 적이 있던 베케트는 36년 자신을 그의 조수로 받아 줄 수 있겠느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침묵의 작가’ 베케트가 새로운 예술적 흐름에 그 누구보다 민감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필름’에는 확실한 주인공이 있었다. 더블린 시절 영화를 즐겨 보았던 베케트는 무성 영화야말로 영화의 본성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절 무성영화의 제왕인 버스터 키튼을 앞세워 단편 영화를 완성했다. 그것은 본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지닌 흑백 단편 영화였다. 그의 매체에 대한 관심은 라디오는 물론이고 TV로도 이어졌다. 65년에는 ‘에이 조’를 집필, 66년 7월 BBC를 통해 방영하기도 했다.

69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튀니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노벨 위원회는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새로운 소설과 희곡 형식으로 고도를 얻으려는 현대인의 궁핍함을 다룬 저작을 높이 평가한다.”

‘고도’는 그에게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가 됐었고, 젊은 날에는 선생 역할을 하면서도 베케트는 꾸준하게 글을 썼다. 유명해진 이후에도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정답을 찾으려고 여러 매체와 여러 형식 사이를 오갔다. 89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매년 작품을 발표하고 연출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행위야말로 고독한 기다림을 넘어서는 생명력이 아닐까. 그는 단순히 침묵하고 기다리기보다 끊임없이 행동하고 집필하는 생명력 넘치는 예술가였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진행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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