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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비극에서 최고의 웃음을 찾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외치며 온갖 ‘가오’를 잡아온 지킬이 사정없이 망가졌다. 그를 망가뜨린 건 일본 최고의 코미디 작가 미타니 코키. 지난해 3월 일본 동경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최신작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가 발 빠르게 한국에 들어와 웃음에 목마른 우리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상업연극으로선 드물게 450석 중극장에 터를 잡고 5월 초 개막 이후 줄곧 예매율 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타니는 일본에서 10년 넘게 방송된 TV드라마 ‘후루하타 닌자부로’를 비롯해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매직아워’ ‘멋진 악몽’ 등 영화와 방송을 넘나들며 온갖 각본상을 휩쓸어온 최고의 스토리텔러.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의 독특한 웃음코드가 일부 일본문화 매니어용으로 통하는 감이 있지만, 오히려 ‘웃음의 대학’ ‘너와 함께라면’ 등 연극판에서 이례적인 롱런을 기록하며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연극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상천외한 설정 자체가 연극적이다. 라디오 드라마 생방송 도중 갑자기 성우가 대본이 구리다며 멋대로 대사를 치기 시작하거나(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암울한 시대에 웃음을 되살리려는 희극 작가와 웃음을 제거하려는 검열관의 대립(연극 ‘웃음의 대학’) 등 황당 시추에이션을 수습하다 다함께 ‘산으로 가는’ 전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정신없는 해프닝에 배꼽을 잡다가 막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반전이 얹어지면, 관객은 2시간의 여흥이 영 헛웃음은 아니었음에 만족한 미소로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사실 유사한 웃음코드를 가진 작품은 많다. 미타니의 진가는 가장 심각한 컨텐트 ‘지킬’을 비틀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한국 공연 흥행사를 새로 쓰며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로 통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웅장한 대극장 뮤지컬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웃음기 없는 가장 비극적인 스릴러 아니던가. 연극은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장면인 ‘confrontation’(아수라백작 1인 2역 가창씬)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아니 극 전체가 그 장면의 패러디라 할 만하다. 실제 뮤지컬 메인 테마를 절묘한 타이밍에 차용하고, 뮤지컬에서도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가 출연해 웃음을 더한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의 한 실험실. 신경의학 전문 지킬 박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라 할 인간의 ‘선’과 ‘악’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신약 개발에 실패한다. 이 사실이 학회에 알려지면 연구 보조금이 끊길 상황. 성공을 가장해야 하는 지킬은 연구 발표회 하루 전, 하이드를 연기할 무명 배우 빅터를 섭외해 폭풍 리허설에 돌입한다. 이 와중에 지킬의 약혼자 이브가 들이닥치고, 이브를 속이기 위해 때이른 실전 상황이 전개된다. 평소 너무 젠틀해 아저씨 같은 지킬에게 영 매력을 못 느끼던 이브는 하이드의 거친 모습에 반하고, 하이드를 연기중인 빅터도 이브에게 반하면서 난감한 상황이 이어진다. 지킬이 뮤지컬의 1인 2역을 하는 게 아니라 2인 1역을 하느라 벌어지는 해프닝인 셈이다.

반전은 이제부터. 이 연극의 미덕은 비극을 희극으로 비틀면서도 인간의 2중성에 대한 원작의 질문 자체는 살아있다는 점이다. 진짜 주인공은 약혼녀 이브다. 뮤지컬에서 상반된 성격의 두 여주인공 루시와 엠마가 하나의 인격 이브로 합체해 ‘내숭’과 ‘화끈’을 오간다. 지킬과 하이드가 아니라, 이브와 하이디의 ‘confrontation’인 것이다.

첫 장면부터 이브의 고민으로 시작된다. 왜 인간은 끌리는 상대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부담없는 상대 앞에서는 자연스런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는 영원히 자기 매력을 못 보여주는 것 아닌가. 누구나 한번쯤 해본 고민이기도 하다. 신약 개발의 성공을 믿은 이브는 또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 스스로 약을 마시고(술이 좀 섞이긴 했다) 와일드한 매력의 ‘하이디’로 변신한다. 결국 약간의 술과 자기 암시로 2중성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 지킬의 실험 자체가 한편의 코미디였다는 얘기다.

한바탕 소동 끝에 모든 것을 알게 된 이브. 새 남자 빅터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뻔한 결말일까. 뮤지컬에서 지킬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결혼식에서 파국을 맛봐야 했던 엠마, 지킬과 하이드 사이에서 헷갈리다 최후를 맞은 루시에게 진정한 비극이 거했다면, 두 남자를 앞에 둔 채 진짜 나는 내가 찾겠다며 총총히 사라지는 이브의 뒷모습에 짜릿한 쾌감이 깃든다. 여자에게도 사랑이 종착역일 필요는 없단 걸 ‘하이디’는 알고 있었던 거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창작컴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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