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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행복어사전] 흉내 내다 벌받았나?

아침에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데 오른쪽 눈 속눈썹에 하얀 실이 하나 붙어 있다. 떼어내려는데 안 된다. 자세히 보니 실이 아니라 속눈썹 하나가 하얗게 세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쓸쓸하다. 귀 옆 머리가 셀 때도, 수염이 셀 때도 이렇게 쓸쓸하진 않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문득 늙어버린 것 같다. 늙으니까 속눈썹 하나가 센 것이 아니라 속눈썹 하나가 세니까 늙어버린 것 같다.

믿기 힘들겠지만 어릴 때 나는 머리숱이 많았다. 숱이 얼마나 무성했던지 머리를 깎으러 가면 이발소 아저씨가 요금을 두 배로 받아야 한다고 농을 할 정도였다. 그 말이 칭찬이란 걸 당시에도 나는 알았다. 왜냐하면 아저씨는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숱 없는 머리를 쓸쓸하게 보았으니까. 가끔은 머리를 깎아주다 말고 거울 앞으로 가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그래서 빗을 것도 없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정성껏 빗어 넘기곤 했으니까. 그럴 때 아저씨의 표정에는 일종의 엄숙함과 비장함마저 느껴졌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그런 것을 우스개의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흉내 내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 웃기는 것을 대단한 재주로 생각해 아저씨 흉내를 냈다. 한번은 그렇게 아저씨 흉내를 내고 있는데 웃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져서 보니 그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궁금한 표정을 하고.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소변기 앞에 오래 서 계셨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소변기 앞에 서 계셨는데 볼 일을 다 보고 나와 손을 씻으며 ‘선생님은 대체 언제까지 소변을 보시는 걸까?’ 궁금해서 일부러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서 계셨다. 한번은 선생님 옆자리에서 오줌을 눈 적이 있었다. 내 소리는 요란했는데 선생님의 소리는 고요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차분하신 선생님의 성품처럼.

그때는 몰랐다. 그런 것을 우스개의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흉내 내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 웃기는 것을 대단한 재주로 생각해 선생님 흉내를 냈다. 소변기 앞에서 한참을 서 계시며 짓던 선생님의 오묘한 표정들을.

재수할 때 나는 잠이 많았다. 학원에만 가면 잠이 쏟아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쉬는 시간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금세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 내가 국어 시간에는 깨어 있었는데 그건 국어 선생님 입안에 침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다혈질이었다. 열변을 토하며 국어를 가르쳤다. 얼굴도 붉었고 언제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숨소리가 거칠었다. 수업은 정말 격정적이었다. 국어를 가르치는 것인지 국어로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나 격정적으로 분필로 칠판을 찍어대는지 수업이 끝나면 동강난 분필 토막이 바닥에 즐비했다.

학원에서 내 자리는 항상 앞자리였다. 늦게 가면 앞자리만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자리에서는 선생님의 침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야 했다. 선생님 입에 침이 많아서 이야기하실 때면 꼭 침이 튀어나왔다. 창으로 들어오는 5월의 햇살 때문에 선생님 입에서 튀어나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침이 다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런 것을 우스개의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흉내 내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 웃기는 것을 대단한 재주로 생각해 선생님 흉내를 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에게 선생님의 열변을 흉내 내곤 했다.

지금 나는 당시의 이발소 아저씨나 선생님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늙지 않을 줄 알았다. 나이 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나이를 먹었다. 그것도 너무 과식한 것 같다.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보이니까.

그것들은 돌아온다. 내가 흉내 냈던 표정과 몸짓들은 돌아와 모두 내 모습이 되었다. 나는 머리숱은 다 빠지고 화장실에 자주 가고 소변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어야 한다. 내 뒤에 온 젊은 동료들이 일을 다 보고 나간 뒤에도 벌서는 심정으로. 나는 입안 가득 침을 머금고 있다. 무슨 주제든 열변을 토할 준비를 하고 말이다.

젊었을 때 앞머리가 자꾸 눈을 가려 입 바람을 위로 부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입 바람을 불다 문득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쓸쓸해진다.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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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