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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가 알린 이름, 공주가 안긴 왕관

천우희. [사진 중앙포토DB]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제가”라는 말 한마디로 한 순간에 유명해진 배우가 있다. 지난해 12월 제35회 청룡영화제에서 영화 ‘한공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천우희(28)다. 트로피를 쥐고 코가 빨개지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여배우를 보며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소감만 듣다가 의외의 곳에서 맞닥뜨린 날 것의 느낌이 익숙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하고픈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작은 영화가 이렇게 큰 상을 받다니…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주시는 것 같아요”라고, “앞으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의 관심과 가능성이 더욱 열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이다.

해를 넘긴 2015년, 그는 이제 레드카펫 전문 배우다. 26일 열린 제 51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여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돌직구를 날렸다. “데뷔 10년 만에 신인상을 받는데요, 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의 영화상’ ‘최고의 영화상’ 등 1년 만에 무려 13관왕째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여배우의 자신감이랄까. 붉은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물 대신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이에 앞서 화창한 5월의 첫날 전주에서 열린 제 4회 모엣 라이징 스타 어워드의 주인공 역시 그였다. 한 해 동안 인상적인 활동을 한 신인 영화감독과 배우를 1명씩 선정하는데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과 함께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 것. 이쯤 되면 누가 한공주고 누가 천우희인지 헷갈릴 법도 하다. 그래서 만났다. 그리고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냐고.

-잇단 수상 축하드려요. 이번엔 소감이 뭔가요.

“상을 너무 많이 받아서 조금 민망해요. 부담도 많이 되고. ‘한공주’로 큰 상도 받고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저를 모르시잖아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요.”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최우수연기상이 아닌 신인연기상 후보에 올랐죠. 여우주연상과 라이징 스타를 오가고 있는 셈인데.

“저는 좋아요.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그래 이제 시작이지’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거든요. 저를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또 어떤 분들한테는 제가 신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신인상도 그렇고, 라이징 스타도 그렇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잖아요.”

백상예술대상의 신인상 기준은 일정한 분량의 주연 혹은 조연으로 3편 이하의 작품을 한 경우다. 2004년 ‘신부수업’으로 데뷔한 11년차 배우지만, 그녀는 여기 머물러 있다. 주연작 ‘뻑킹 세븐틴’(2011)과 ‘사이에서’(2012)가 있지만 두 편 모두 30분 남짓한 단편영화이기 때문이다.

되레 관객은 조연으로 출연한 작품에서 그를 기억한다. 진태(진구)의 여자친구로 분한 ‘마더’(2009)에서는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뽐냈고, 춘화(강소라)에게 버림받은 ‘써니’(2011) 본드녀의 발악은 너무 리얼해 섬뜩하기조차도 했다.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야말로 씬 스틸러다.

-‘마더’를 찍을 때 부모님한테 베드씬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요.

“아, 저는 사실 작품을 할 때 가족들한테 말을 안 하는 편이예요. 한공주 때도 그랬고.”

-너무 센 역할이라 그런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부모님께서 저를 유별나게 아끼세요. 그래서 일적인 걸로는 터치를 못 하게 하는 거죠. 괜히 걱정하시고 그럴까봐. 배우라면 노출이든 뭐든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마더’를 보며 우셨다는 얘길 들으니까 속상하더라고요. 지금도 굉장히 궁금해 하시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믿고 기다려 주시던 걸요. 예고편 보고 기대하기도 하시고.”

사회가 빚은 결핍, 그에 맞서는 분투

‘한공주’는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공주는 친구의 “첫 키스는 해 봤느냐”는 질문에 무표정하게 답한다. “43명, 그것도 고릴라와 했다”고. 한 학급 숫자에 달하는 가해자가 존재하지만 피해자는 더 큰 재앙을 피할 수가 없다. 세상의 시선이, 가진 자의 권력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개봉한 영화 ‘카트’와 ‘우아한 거짓말’ 역시 현실 속 부조리를 포착한다. 2007년 이랜드의 홈에버 비정규직 부당 해고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취업준비생 미진은 생존을 위해 마트 언니들과 연대하고, 따돌림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여중생의 죽음 앞에서 미란은 가해자일지도 모르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시공간은 다르지만 사회가 빚어낸 결핍 속에서 그걸 메우기 위해 분투하는 개인의 변주랄까.

-특별히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선호하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닌데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영화를 통해 사람들한테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제가 연기를 잘할 수 있고 또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저는 제가 맡은 역할보다 전체 시나리오를 많이 봐요. 시나리오 자체가 매끄러운 걸 선호한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합당한가, 과연 이 인물의 행동은 정당한가.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따져보는 것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면.

“다 애착이 가죠. 어느 역할이나 저랑 닮은 부분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고요. ‘한공주’는 특히나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친구를 표현하다 보니 아무래도 가슴에 제일 많이 남아요. ‘사이에서’도 정말 좋았어요. 영화가 중간에 엎어져서 촬영한 지 3년 뒤에 봤거든요. 그런데 제가 정말 활어 같이 화면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는 거예요. ‘아, 나 정말 저기서 살아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생을 많이 했는데 노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섭섭하진 않았나요.

“전혀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써니’ 개봉하고 MBN ‘뱀파이어 아이돌’이란 시트콤을 하고 나서 2년 정도 작품이 없었어요. 오디션도 처음부터 잘 된 편이라 운이 아주 좋구나 생각해 왔는데 처음으로 계속 떨어져 보니 제가 부족해서 안 되는 것 같아 자책감이 많이 들더라고요. 대학도 졸업하고 소속사도 생겼는데 더 막막해진 거죠.”

-그러고 보니 ‘신부수업’에서 깻잎2로 데뷔하고 나서 ‘마더’까지 여백이 좀 있네요.

“그 땐 오디션이라든가 기획사라든가 이런 거에 굉장히 무지했어요. 고등학교 때 우연히 친구 따라 연극반에 갔는데 너무 재밌어서 ‘아 대학 가서도 연기를 하면 되겠구나’ ‘이걸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거든요.”

-영화에서도 교복을 자주 입었죠. 연극에서 처음 맡은 역할도 불량 학생이었나요.

“아니요.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라고 위안부 소녀 역할이었어요. 위안부 실태를 고발한다기보다 해방 이후 귀향을 앞둔 소녀들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었어요. 저는 제 만족을 위해서 연기를 했는데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찾아뵙기도 하고 사람들이 다양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걸 보면서 책임감을 느꼈죠. 첫 기억 때문인지 새로운 작품을 대할 때마다 더 진지해지는 것 같아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역시 오디션였어요. 한창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 한공주를 만나게 됐어요. 처음엔 ‘써니’에서의 강한 이미지를 탓하기도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준비가 덜 됐던 것 같아요.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한 모습만 볼까 원망했었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저한테 꼭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까진 어려움도 없었고 항상 자신만만했으니까. 오히려 그 시간을 겪고 나서 간절함도 더 커졌고 여유도 좀 생겼어요. 기다릴 줄도 알고.”

-오디션에 강한 비결은 뭔가요.

“평소에는 부끄러움을 타다가도 오디션 볼 때는 무슨 자신감인지 정말 안 떨어요. 그래서 오히려 다들 속으시는 거죠. 쟤 뭔가 있나 본데 하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간절한 티를 내지 않는달까.”

때론 소녀처럼, 때론 전사처럼

오랜 담금질 덕분일까. 그는 자신 앞에 놓인 기회를 낚아챌 줄 아는 배우다. 대표작을 내놓기가 무섭게 1년간 세 편의 영화 촬영을 마쳤다. 그 면면도 만만치 않다. 판타지 로맨스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우에노 주리ㆍ한효주 등 또래 여배우들과 겨루고, 스릴러 ‘곡성’과 ‘손님’에서는 황정민ㆍ류승룡 등 대선배들과 합을 맞춘다. 7월 ‘뷰티 인사이드’를 시작으로 줄줄이 개봉 예정이다. 천우희의 대표작이 바뀐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센 작품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셈이다.

-각각 어떤 인물인가요.

“세 영화 다 제가 핵심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 자세히 설명을 못 드리겠어요. 심지어 나홍진 감독님 작품(곡성)에서는 이름이 무명이잖아요. 정말 미스터리한 인물이라.”

-그래도 힌트를 좀 준다면.

“‘뷰티 인사이드’는 한 남성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내용이고, ‘손님’은 한국 전쟁이 배경이에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모티브예요. ‘곡성’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굉장히 정밀하게 전개되요.”

-촬영이 다 끝나서 한숨 돌렸겠어요. 특별히 해 보고 싶은 역할이 또 있나요.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데.

“네. 요즘은 다음달 크랭크인하는 영화 ‘해어화’ 때문에 매일 4시간씩 노래와 춤 수업을 받고 있어요. 1940년대 기생 양성소에서 자란 기녀 역할을 맡았거든요. 항상 말하는 건데 멜로도 하고 싶고, 액션도 해 보고 싶어요. 드라마도 좋은 작품이 있다면 당연히 하고 싶죠. 아직 해본 것보다 못 해본 게 훨씬 더 많으니까요.”

-‘한공주’에서도 기타를 치고 말 대신 노래를 했잖아요. 원래 노래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좋아는 하는데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에요. 기교가 필요한 역할은 아니었잖아요. 저희 식구들이 워낙 음주가무에 능하긴 하지만요.”

-그럼 술도 잘 마시겠네요.

“못 마시는 편은 아닌데 그냥 친구들과 기분 내는 정도.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그보다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작년 가을에 독립했거든요. 혼자만의 공간이 생기니까 참 좋은 것 같아요. 제 부엌도 있고. 집에 와서 저를 위해 요리를 하다 보면 힐링이 된다고 해야 하나. 얼마 전 떡갈비를 처음 만들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요리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이고, 한옥 풍경에 감탄하며 셀카를 찍는 그녀의 모습은 딱 제 나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작품 이야기를 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면 여전히 공주가 보였고 상미가 비쳤다. 작품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비결은 ‘그 인물대로 마음을 먹는 것’이라 하더니 정말 그 인물을 언급할 때마다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직 해 본 것 보다 못 해 본 것이 더 많은 그는 액션도 욕심나고 코미디도 탐난다고 했다. 서른을 앞둔 천우희의 버킷리스트인 세계여행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가장 좋아한다는 수식어 ‘천의 얼굴’은 곧 온전히 갖게 될 듯하다.

글=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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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