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세상 속으로]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겐 아내가 꼭 필요하다”

지난 1일 수만 명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소설의 도입부, 최고의 첫 문장 Best 10’.

 글엔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이상, 『날개』) 등이 포함됐다.

 그러자 여러 네티즌이 ‘내가 꼽는 소설 최고의 첫 문장’을 경쟁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윌리엄 아이리시, 『환상의 여인』),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최인훈, 『광장』)….

 고전만 간택되진 않았다. 어떤 이는 “전 『닥터스』 첫 소절 ‘바니 리빙스턴은 로라 카스텔라노의 알몸을 본 첫 번째 소년이 되었다’. 덕분에 한 번에 끝까지 읽어버림”이라고 했다. 다른 이는 “『러브 스토리』. 고교 시절에 이 첫 문장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What can you say about a twenty-five-year-old girl who died?(스물다섯의 여자가 죽은 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라고 적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티븐 킹도 첫 문장 수년간 고민=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인기 작가들이 꼽는 문장은 뭘까. 본지는 소설가 김훈·김연수·정유정에게 좋아하는 소설 첫 문장(본인 작품과 다른 작가 작품 하나씩)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김훈은 “모든 문장은 고심 끝에 나오는 것인데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절대적으로 좋은 문장은 아니겠지요”라며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스스로 『칼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쓸 때 조사를 놓고 일주일 넘게 고민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꽃이 피었다’고 하면 사실을 진술하는 문장, ‘꽃은 피었다’고 하면 사실에다 들여다보는 사람의 주관적 정서가 들어간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 “(홍명희의) 『임꺽정』 같은 소설은 문학적 위상을 차치하더라도 정말 대단히 훌륭한 문장”이라고 했다. “긴 문장,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문장이 나와도 그 문장의 논리적 주어, 술어가 제자리에 있어 하나의 완성된 언어 구조, 언어기록입니다.” 이런 ‘문장론’도 덧붙였다. “문장은 벽돌 같은 겁니다. 벽돌을 쌓아야 담이 되잖아요. 그래서 문장은 다 중요합니다. 소설 전체의 첫 문장뿐 아니라 소설 속 챕터가 바뀔 때마다, 패러그래프가 바뀔 때마다 첫 문장이 필요합니다. 패러그래프를 바꾼다는 건 지금까지와 다른 진술을 하겠다는 뜻이잖아요.”

 김연수와 정유정은 비교적 흔쾌히 답변에 응했다. 김연수는 『롤리타』의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를 꼽았다. “여주인공의 이름이 어떻게 발음되는지 매우 육감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소설의 내용과 직결됩니다. 다 읽고 나면 이 도입부는 너무나 의미심장해지죠.” 자신의 작품 중에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앤이 죽고 난 뒤…”를 택했다(전문은 표 참조). 그는 “구체적인 사물을 제시하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소설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해서”라고 했다.

 정유정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첫 문장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쓴 『미저리』의 첫 문장, ‘넘버 워워원. 당시인의 너엄버 워어언 패애앤’(넘버 원, 당신의 넘버 원 팬이란 의미로, 화자의 특징이 드러나게 일부러 철자를 틀리게 씀)”이라 했다. “섬뜩하면서 유머러스하고, 소설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첫 문장이라고 생각해서요. 넘버 원 팬=사생팬=스토커=애니윌크스. 저 정도로 사랑하는 팬이 있는 주인공, 폴이 같은 작가로서 좀 부럽기도 했어요.” 본인 작품 중에선 『28』의 첫 문장, “베링해가 훅, 사라졌다”를 꼽았다. “특별한 뜻이 있어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고요. 문장을 쓸 때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소설 탈고하기 두 달 전에야 가까스로 썼으니까요.”

 정유정이 언급한 스티븐 킹은 세계적인 글쟁이다. 그런 킹도 흠모하는 문장은 있다. 그는 2013년 인터뷰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제임스 M 케인)의 첫 문장, “그들은 정오 무렵 건초 트럭에서 나를 내던졌다”를 꼽았다. “(이 문장으로) 당신은 이야기 안에 바로 들어가고,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치명적인 총알 같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이 쓴 최고의 첫 문장으로는 “당신은 예전에 여기 있었다”(『욕망을 파는 집』)를 뽑았다. “독자들이 계속 읽게 하기 때문”이라면서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도 밝혔다. “난 잠들기 전 침대에서, 어두움 속에서 생각한다. 내가 얻는 것에 행복할 때까지 여러 주, 여러 달은 물론이고 수년간 생각할 때도 있다. 내가 괜찮은 첫 문장을 얻었다면 그 책을 써도 되는 때다.”

◆“인생의 핵심 전달하는 페이소스”=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영미권 매체는 수년 전부터 ‘소설 최고의 문장’ 뽑기를 해왔다. 미국 서평지 ‘아메리칸 북 리뷰’(1977년 창간)는 인터넷 홈페이지 첫 화면 하단에 ‘소설 최고의 첫 문장 100’이라 해놓고 클릭하면 명단을 볼 수 있게 한다. 2006년 선정한 명단이지만 지금까지 독자들이 찾아 읽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도 ‘문학 최고의 첫 문장 30’을 지난 4월 카드뉴스(이미지와 간단한 텍스트로 구성한 콘텐트)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오만과 편견』 출간 200주년이던 2013년에 뽑은 명단을 재활용했다.

 두 명단의 상위 10개 문장 중에선 4개가 겹친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오만과 편견』)가 각각 2위·1위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모양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안나 카레니나』, 6위·2위), “최고의 시기이자 최악의 시기였다…”(『두 도시 이야기』, 9위·3위),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번을 쳤다”(『1984』, 8위·4위)가 뒤를 이었다(전문은 표 참조). 영국 매체에선 영국 작가 작품 순위가 더 높다.

 이들 문장은 뭐가 특별할까. 매체들의 평을 종합하면 ▶평범해 보이지만 당시 계층과 사회적 관습, 편견을 비꼬고(『오만과 편견』) ▶인생의 핵심을 전달하는 페이소스가 있고(『안나 카레니나』) ▶혁명기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고(『두 도시 이야기』) ▶절대권력 빅브러더와 13시를 등장시킨 혜안(『1984』)을 보여준다고 한다.

 한국 소설과 관련해선 서점 ‘반디앤루니스’가 독자들이 선정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과 선정 이유를 지난해 12월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했다(표 참조). “나는 태어날까 말까를 내 스스로 궁리한 끝에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문장엔 “첫 문장만으로 주인공의 인생을 읽어버린 것 같았다”는 평,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젊은 느티나무』)”엔 “읽을 때마다 생생한, 정말이지 언제나 간직하고픈 첫 문장”이란 평이 붙었다. 김민경 콘텐트에디터는 “첫 문장을 공유하는 놀이로 서로 소통하고 더 많은 독자에게 소설을 알릴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소설 첫 문장을 공유하는 놀이’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정보의 핵심을 인상적인 한 문장으로 전달하려는 요즘 세대의 욕망과 직결된다는 분석도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SNS에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 메시지를 보내는 요즘엔 길게 써봐야 가독성이 없으니 짧고 인상적으로 쓰는 게 중요해졌다”며 “모든 이가 카피라이터가 되어가는 시대니 인상적인 소설 첫 문장에서 뭔가 배우려는 이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첫 문장을 나눈다고 책을 많이 읽게 되진 않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반면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그런 식으로라도 자극을 받고 책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봤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S BOX]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밤’ ‘옛날 옛날에’… 진부한 첫 문장 뽑는 대회도

소설 최악의 첫 문장을 뽑는 대회가 있다. 1982년에 시작된 ‘불워 리턴 픽션 콘테스트(Bulwer-Lytton Fiction Contest·BLFC)’다.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이름에서 땄다. 그의 소설 『폴 클리퍼드』(1830)의 첫 문장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가 진부한(클리셰) 문장의 표본처럼 여겨지면서다.

 이 문장은 수차례 패러디되며 조롱받았다. 만화 ‘피너츠’에서도 강아지 스누피가 항상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쓴다.

 BLFC는 새너제이 주립대 영문과가 지원하는데 1등에게 150달러를 준다. 영미권뿐 아니라 러시아·일본·파키스탄·브라질·독일에서도 응모한다. 2013년 1등엔 “그녀가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중략)”가 꼽혔다. 부문도 여러 가지인데 2014년 어린이 문학 부문에선 “저스틴은 행복했다”가 선정됐다. 이 밖에 ‘옛날 옛날에’와 ‘펜은 칼보다 강하다’도 대표적인 진부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스티븐 킹은 “나쁜 첫 문장은 읽자마자 책을 사지 말아야겠다고 확신시키는 문장”이라 했다.

 좋은 첫 문장을 쓰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 잡지 라이터스 다이제스트(Writer’s Digest)는 이런 방법을 제안한다. ▶영원한 원칙 서술(『오만과 편견』 『안나 카레니나』처럼) ▶목소리 소개(『롤리타』처럼) 등이다.

 어떤 이는 소설 첫 문장보다는 마지막 문장을 외운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무진기행』),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다”(『위대한 개츠비』) 등이다. ‘신의 선물’이라는 첫 문장 못지않게 책장을 쉽게 덮지 못하게 하는 마지막 문장의 힘은 세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