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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 (하편)'

<지만원씨의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글 전문>



1990년,11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위안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취지로 창설됐다. 창설 당시 정대협 운영을 주도한 사람들은 소위 '이대' 졸업생들이었다 한다. 윤종옥(83세 가량)은 이휘호씨(김대중의 처)의 선배이자 기독교인으로 알려졌고, 지은희는 전여성장관, 그리고 이미경은 열우당 의원이다. 그리고 신혜숙 등이 있다 한다.



1991년, 정부는 전국 읍면동에 공문을 보내 "위안부에 대해서는 비밀을 보장해 줄테니 창피해 하지 말고, 신고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신고자는 총 2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125명 정도이며, 이 125명 중 진짜 "일본군위안부"라고 자기들끼리 확인한 노인들은 33명이다. 이 모임은 약칭 "무궁화회 할머니회"로 불린다. 이 할머니 대표가 바로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로 확인된 '심미자'(82세) 할머니이며, 2005.4.13. 오전과 오후에 걸쳐, 필자가 여러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현재 매주 수요일 시위에 나오는 할머니들 중 언론에 얼굴이 가장 많이 비친 할머니는 두 분 정도인데, 공교롭게도 이 두 분에 대해서는 일본 사회(국회의원, 기자)에서 "저 분들은 아니다"라는 평을 받은 분들이라 한다. 이 두 분은 아직도 정대협에 소속돼 있다 한다.



정대협에서 실망을 느낀 5명의 할머니들이 조계종 송월주 스님을 찾아가 생활고를 호소했고, 불교계 및 사회 각계에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으로 <나눔의 집> 개소식을 갖게 되었고,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 1995년 12월 조영자씨가 기증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소재 650여 평의 대지에 300여 평의 건물이 지어져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위안부 할머니 1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 한다.



이 곳은 관광하러 한국에 온 일본인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고, 국내외로부터 성금이 답지된다고 한다. 먼저 나눔의 집을 지어달라 호소했던 할머니들은 운영자측에 대해 많은 불만이 있어 나갔고, 현재 홈페이지에는 10명의 위안부 얼굴들이 나타나 있지만 이들 중 약 5명 정도는 중국에서 온 할머니들이라 한다. 이 중국 할머니들 중 몇 명씩이 하루에 3만원을 받고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 집회에 나간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정대협'이 기독교인들이 만든 단체라면 '나눔의 집'은 불교인들이 만든 복지시설이다. 원장은 혜진 스님, 무궁화회 33인은 진짜 "일본군위안부"이라 주장하며, 이분들은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무궁화회 할머니 심회장은 불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1) 두 기관들은 위안부를 이용하여 국내외로부터 모금도 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올리기 위해 일하며, 모금한 돈을 나누어 주지도 않는다.



2) 몇 명 안 되는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키고 다닌다. 우리는 돈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명예다. 우리를 이용하여 국제 모금을 하는 것은 우리를 두 번 모욕 주는 행위다.



이러한 취지에서 심미자 할머니는 6명의 변호인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통해 2004년 3월, 위 두 기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를 상대로 "모금행위 및 시위동원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가처분신청 자료 보관중).



위안부를 위한 일본인 사회운동



1995년, 일본에서는 무라야마 전직 총리가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일본 사회에서 광범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으로부터 피해를 본 12개국 여성들을 위한 단체인 것이다. 실제적인 주택개선, 간호 및 의료, 의약품 보조 등 본인의 실정과 의사를 반영하여 지원하겠다는 것을 문서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한국 위안부들에게는 500만엥씩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할머니들이 이 돈을 받으려 하자 정대협과 정부에서는 할머니들에게 "당신들이 이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으면 창녀가 된다. 절대로 받지 말라"고 했고,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받아서 기념관과 위령탑을 건립할 것이니 정부에 달라"는 말을 했다 한다.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7명이 500만엥을 받았는데 정대협은 이 할머니들을 가르켜 창녀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진짜 할머니 말에 의하면 "개인이 받으면 창녀이고, 정부가 받으면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며 분해 했다.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은 나머지 위안부들은 한국정부로부터 3,150만원씩을 받았다 한다. 진짜 할머니는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은 2005.3.31자로 할머니에게 한국정부가 중간에서 방해한다는 뉴앙스가 풍기는 편지를 보내왔다.



박봉순 할머니의 경우



박봉순 할머니는 33인중 한 분으로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인해 여생을 병으로 보내다가 2005.2.30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분은 17년간 내내 식사를 하지 못했다 한다. 일본인 자원봉사단체인 '학기리'(확실하게 일한다는 뜻)의 대표 '우스끼'상이 할머니를 데려다가 정밀검사를 받게 한 후, 할머니에 맞는 우유를 개발해 17년간 보내왔다 한다. 1년에 5회 정도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와 불편한 점들을 점검했고, 아프면 일본으로 모셔다가 입원도 시켰다.



한국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있는데 회장이 양 모씨라 한다. 양회장은 공개적으로 통곡을 했고, 5일장으로 장례식을 연기했다 한다. 널리 보도됐던 장례식에는 약간의 일본인들 말고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한다. 화장터에서 유골을 찾을 때, 한국인의 그 누구도 화장비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스끼'상이 냈다 한다. 박할머니의 유골을 운반하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 82세의 심미자 할머니가 유골함을 앞에 메고, 추위에 버스 두 정거장 길을 걸어 대기중인 봉고차를 타고 천안에까지 갔다 한다. 천안의 '망향의 동산'에까지 무릎에 얹고 가는데 너무나 힘들고 추워서 그 후 심히 앓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우며, 애국자인 체 하고, 양심가인 체 하던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없는가! 박봉순 할머니는 일본 여성들이 17년간 부모처럼 돌보았고, 장례식 비용도 부담했고, 장례식도 치렀다.





* 일본 봉사단체와 한국 봉사단체는 어떻게 다른가? 일본 봉사단체는 17년간 박 할머니에게 일반 자식들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장례도 치렀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그 많은 위안부 봉사단체는 무엇을 했는가?



*일본 봉사단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감동할만한 봉사를 했지만 위안부를 위한다는 그 많은 한국의 봉사단체들은 위안부를 앵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다는 말인가?



* 박 할머니에게 1억 5천만 원이라는 눈물 젖은 돈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500만엥(5천만원)을 받았고, 다달이 받은 60만원들이 모인 돈이다. 이 돈은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가만 두면 정부가 갖게 된다. 그 돈을 정부가 갖어야 하는지 정부의 조치가 주목된다.



심미자 할머니의 경우



심미자 할머니는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판결 받은 분이다. 이 할머니를 위해 법정투쟁을 해준 변화사들은 한국인 변호사가 아니라 일본인 변사호사들이며 '우스끼'상과 '히라다'상이라 한다.



1940년 황해도 모 학교 5학년 때였다. 그녀는 자수를 잘 놓았다 한다. 한국지도에 무궁화꽃이 만발한 자수를 놓았더니 선생님이 교실 벽에 붙여놓았다. 이를 본 일본 선생이 일본 지도에 꽃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심할머니는 일본 지도에 나팔꽃을 수놓아 주었다. 하루는 일본 순경이 잡아다 심문을 했다. 일본 꽃은 사꾸라 꽃인데 왜 하루살이 꽃인 나팔꽃을 놓았느냐는 것이 트집이었다. 일본 순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고진 고문을 당했다. 등과 다리, 손톱에 심한 고문을 당해 아직도 고문자국이 깊게 패여 있다.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일본 당에 갔는데, 마침 얼굴이 예쁘고 지적으로 생겨서 일본헌병대장 스즈끼의 애인이 됐다. 신임을 얻은 할머니는 유곽생활은 면하게 됐다. 스즈끼 헌병대장의 부인이라는 증명서까지 받았다. 당시 한용운과 김마리아가 찾아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다. 엄마와 할머니한테 가는 게 소원이라 했더니 그러면 독립운동에 자금이 필요하니 자금을 대라고 말했다 한다. 심 할머니는 그게 정말인 줄 알고 일본군 장교들의 빨래를 해주고, 뜨개질도 하고, 하나마끼라는 허리에 차는 돈지갑을 만들어 20원씩에 팔아 자금을 댔다고 한다.



독립군이 와서 여행증명서를 해달라고 부탁하면 스즈끼 대장에게 친척이라고 말해 '자유통과' 효력을 가진 강력한 여행증을 만들어 주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 심 할머니가 현지 증언을 하러 후꾸오카에 갔을 때, 법정에 들어서려는 할머니에게 "얼마를 보상하면 되겠느냐"고 말하기에 "야 이 나쁜 자식아, 내가 돈 받으려고 증언을 다니느냐, 일본 땅 전체를 주어도 보상이 안 된다"고 소리를 친 후, 졸도를 했다 한다. 할머니를 보상이나 받으러 다니는 존재로 알고 있는 데 대해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일본인들에 이런 인식을 심어준 것은 바로 한국의 언론이요 한국의 위안부을 위한다는 사회단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할머니는 분노했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제발 접어야



현재 남아 있다는 125명의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그 125명 중의 33명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은 한국의 위안부 봉사단체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금전적인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고, 생활지원도 별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심 할머니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한국정부로부터는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가? 한국정부는 오히려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받는 도움마저 못 받게 하는 방해꾼이라는 게 심할머니의 말이다.



지난 15년의 봉사활동이 이와 같다면 '정대협'과 '나눔의 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매일 같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위안부 시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에 대해 심 할머니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모금과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하는 것이고, 둘째, 위안부들의 명예를 짓밟는 행위라고 말한다. 심할머니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회복이라 한다. 자신들은 창녀가 아니라 국가가 강하지 못해 당한 희생양들이며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기 때문에 '세계평화를 위한 무궁화회 할머니'들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 희망에 반해 오히려 위안부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위안부들을 창녀라고 하니 기가 막히고 원통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과연 위안부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그 할머니 곁에는 그 할머니를 위한 자서전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한 사람이 있다. 자료는 실로 방대했다.



일본 사회봉사 단체 그리고 이론 정부는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 한국의 정부와 사회단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불신하고 있다 한다. 그 한 예가 "위안부 행사 뒤에는 북한 공작원이 있다"는 취지의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위안부들을 더 이상 욕보이지 않고, 한국의 명예를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는 활발하게 공론화되고 조사가 돼야 할 것이다.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 대해사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할머니의 주장이다.



이 대로의 위안부 행사나 위안부를 위한 사회활동은 대한민국의 명예와 '진짜 위안부'들의 명예를 위해사라도 중지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필자는 어떤 불순세력들이 미선이-효순이를 왜곡하여 반미감정을 일으켜, 한국국민을 세계에서 가장 의리없고 은혜를 모르는 배운망덕한 국민으로 만드는데성공했고, 이와 동시에 위안부 역시 반일감정을 유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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