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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오늘 하루도 지옥철에서 얼굴을 붉히는 당신에게

이 현
JTBC 국제부 기자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긴장감이 감돈다. 지금 물러서면 내릴 때까지 서서 가야 한다. 재빨리 열차에 올라타지만 역시나 빈자리는 없다. 아주머니 한 분이 자꾸 몸을 기대는데 아무래도 내 앞에 앉은 남자에게 ‘어필’을 하려는 것 같다. 모르는 척 참다가 발까지 밟는 통에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자리에 앉고 싶으시면 이분한테 말씀을 하세요. 아니면 저한테 옆으로 좀 비켜 서달라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파랗게 젊은 것이’로 시작되는 예의 그 레퍼토리가 펼쳐졌다.

 서울의 ‘뚜벅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은 싸움에 휘말리거나 싸움 구경을 하게 된다. 요즘은 어르신과 젊은이의 자리 다툼 정도가 아니라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는 전면전이 자주 벌어진다. 백팩에 맞았다고 젊은이들끼리 싸우질 않나, 얼마 전엔 지하철에서 80대 할아버지가 노약자석에 앉아 졸던 66세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싸움이 붙은 일이 보도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수준이다.

 어느 사회에나 진상 승객들은 있는 법이고, 다툼이 없을 리 없지만 서울이 유별나긴 한 모양이다.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 안내 사이트 한 곳에는 서울의 지하철에서는 ‘실례합니다’라는 말 없이 무작정 팔로 밀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적혀 있다. 대응 요령은 ‘그냥 쿨하게 넘기기(Be cool homie!)’. 내릴 땐 똑같이 팔로 떠밀 수도 있겠지만, 대신 쿨하게 ‘잠시만요’ 혹은 ‘내릴게요’라고 말할 것을 추천한다.

 5개월 차 신입사원인 대학 후배가 며칠 전 출근길에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숨 쉬기도 힘들게 사람이 들어찬 열차 안에서 머리 위 광고판만 보며 버티고 서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느닷없이 “왜 내 발을 밟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발을 밟은 건 그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는 판에 욕으로 맞받아칠까 하다 이 사람도 오죽 화가 났으면 이럴까 싶어 이렇게 말했단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사세요?”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졌고, 화를 냈던 남자는 얼굴이 새빨개져 다음 역에서 내렸다.

 savoir-vivre(사브와르 비브르). 프랑스어로 매너를 뜻하는 말이다. 직역하자면 “사는 법을 알다” “삶을 즐기는 법을 알다”는 뜻도 품고 있는 단어다. 타인을 배려하는 매너가 곧 내 일상을 즐겁게 만드는 길이라는 프랑스 사회의 가치관이 녹아 있다. 지금 당신이 탄 그 열차에, 그 환승 통로에 지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 서로 움직이기 전에 한 번만 주의를 기울이고, 째려보기와 반말 대신 쿨하고 재치 있게 돌려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현 JTBC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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