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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긍휼

긍휼
성동혁(1985~ )


그러니까 대체로 시금치를 데치는 저녁

그해 겨울 아비들은 모두 슬펐지요

자녀들은 침통을 쏟으며 집을 나갔고

노을엔 잃어버린 바늘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높은 침엽수처럼

넓은 침엽수처럼

천사들에게도 수목원이 있다면 그곳에서 길 잃은 낙뢰들을 키우자 맘먹었을 것입니다

우체통에 기댄 소년이 붉게 터지건 말건 멀리서

신의 머리카락을 주우며

찬송가를 부르는 노인들

바람은 종종 아무 이유 없이도 겸허하게 붑니다

이유는 바람에게 없고 제게만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시금치를 데치는 저녁

손잡이가 없는 잔을 쉽게 놓치던 저녁

사람이 없어 소리 지르지도 않았던 저녁

깨진 잔을 주우며 붉게 꽂히던 저녁

우산을 잊어 다시 집으로 들어가던 저녁


내게도 이런 저녁이 한번쯤 있었던가? 집집마다 늙은 침엽수 같은 애비들이 있던 시절, 시금치 데치는 저녁은 대체로 침통했다. 어디로 갈거나? 서편 하늘엔 붉은 물감이 엎질러져 있고, 비탈길들은 땅그늘에 먹힌다. 집을 뛰쳐나왔건만 오갈 데 없어 거리에 서서 바람이나 맞던 때는 “손잡이가 없는 잔을 쉽게 놓치던 저녁”이다! 집 나와 붉은 우체통에 머리를 기댄 소년이 천사들의 수목원에서 “길 잃은 낙뢰들을 키우자”고 맘먹은 그 소년이다. 내 소년의 어느 저녁도 그와 똑같았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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