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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김영희 PD "착한 예능? 생각보다 전 착하지 않아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 ‘느낌표’ ‘전파견문록’ ‘나는가수다’. 김영희(55) 전 MBC PD가 연출을 맡았던 프로그램들이다. 한국 유명 PD로는 처음으로 중국 진출을 앞둔 그를 지난 11일 오후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그는 중국 현지 방송·제작사 서너 곳과 방송 제작 관련 계약을 조율 중이라고 했다. 이날 인터뷰는 그의 중국 출장 하루 전날 이뤄졌다. 인터뷰 중에도 김 PD의 휴대전화는 중국 관련 통화로 분주했다.



중국 진출 앞둔 '쌀집아저씨'

 
어머니 이부영씨와 함께한 서울 유성유치원 졸업식.
“패싸움이 벌어지고 가담자들이 학교에서 징계를 받게 됐어요. 그런데 전 제외됐죠. 반장이고 성적이 좋았으니까요. 함께했던 친구들이 정학 처분받고, ‘빠따’ 맞고 하는 걸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비굴하게 살지 말자. 솔직하게 살자. 제 생활 신조가 그겁니다. ‘비겁하게 살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김영희 PD는 개구쟁이·말썽쟁이였다. 경희대 부속초등학교에 다닐 땐 야구선수였다. 리틀야구 국가대표로 활동했고, 춘계야구대회 땐 6할의 타율을 올린 타격왕이었다. “야구 선수가 될 뻔 했어요. 한 야구 명문 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죠. 하지만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어요.”

 중고등학교 땐 내내 반장이었다. 공부를 잘했고, 리더십이 있었다. 친화력이 있어서 싸움 잘하는 친구, 얌전한 친구 모두와 잘 어울렸다. 패싸움이 있을 때도 적극 가담했다.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공부도 열심히 했다. 부모님은 그에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강직한 성격이셨고, 어머니는 ‘경쟁을 하면 지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인지 뭘 하든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공부할 때도 그랬고, 나중에 PD가 돼서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남들보다 10배는 더 노력했어요. 열심히 하는 건 정말 자신있습니다. 전 그런 게 진정성 아닌가 싶어요. 사람이 뭔가를 열심히, 진정성 있게 하면 상대방이 알아줍니다.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죠. 프로그램을 정말 열심히 만들면 시청자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요.”

왜 PD 됐냐는 질문이 젤 어려워요 어린 시절 꿈이 없었거든요
안 해보면 모르는 거죠, 재미없을 거라던 ‘양심냉장고’도 히트
1회 편집 때 많이 울었어요 ‘이런 기적, 내게 일어날 수 있구나’


 군인 출신으로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선택한 건 국립대 사범대의 등록금이 제일 싸서였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8만원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PD가 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땐 꿈이란 게 없었죠. 그때 제 세대는 그냥 공부하고 학교 다니고 선생님 말 잘 듣고 하면 됐던 때니까요. 아마 열에 아홉은 그랬을 걸요.”

 왜 PD의 길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질문이 가장 곤혹스럽다”며 “나는 그냥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그저 자유롭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PD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한번에 붙었고, 입사 후 운 좋게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하게 됐고, 하다보니 열심히 하게 됐고, 지금까지 정신없이 열심히 하고 있는 거죠. 모든 PD들은 자신이 만든 작품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중 소수만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는데 전 운이 좋아 성공을 거두는 편이었고요.”

‘몰래카메라’로 PD 데뷔
 
96년 제주도 가족여행에서 당시 구의초 1학년이던 딸 현진씨와 찍은 사진.
힘겨웠던 5~6년간의 조연출 시절을 거쳐 정식 PD가 돼서 만든 첫 작품은 ‘몰래카메라’였다. 원래 송창의 PD가 하던 걸 물려받으면서 7~8분 정도였던 방송 분량을 40~50분으로 늘렸다. 첫 출연자는 가수 이범학. 퀴즈 아카데미에 출연한 이범학이 어이없는 문제 때문에 황당해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화제를 모았다.

 첫 히트작은 96년 ‘양심냉장고’였다. “기획할 때 반대가 많아서 고생했어요. 이게 무슨 재미가 있냐, 시청률 안 나올 게 뻔하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안 해보면 모르는 거예요. 제 머릿속에서는 분명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첫 번째 양심냉장고는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차선을 지킨 장애인 이종익씨에게 돌아갔다. 당시 방송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후 2년 반 동안 100회가 넘게 방영됐다. “첫 회 이종익씨 편을 촬영하고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이런 기적이 내게 일어날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에 멍했어요. 편집을 하면서 많이 울었죠. 방송 후 사람들마다 ‘너 그거 봤냐’ ‘정말 부끄러운 현실이다’고 했고요.”

 양심냉장고 이후 손대는 작품마다 화제를 모았다. ‘느낌표’ ‘전파견문록’ ‘이경규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이걸 성공시켜서 시청률을 높여야 겠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뭘 만들면 시청자가 좋아하고, 감동하고, 행복해할까를 생각해요. 시청자와 공감대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방송을 만드는 기계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방송의 내용은 사람입니다. 따뜻한 사람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는 실패합니다.”

술 취해 잘못 들어간 옆집에서 아내와 첫만남
 
1992~93년 ‘코미디 극장’ 연출 시절의 김영희 PD.
99년 ‘칭찬합시다’ 촬영 현장에서 개그맨 김용만(왼쪽)·김국진(오른쪽)과 함께.
2003년 ‘느낌표’의 ‘책 읽읍시다’에 출연한 유재석(왼쪽)·김용만(오른쪽)과.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경규가 간다’ 백두산 편 촬영 당시 MC 이경규(왼쪽)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저 착한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날 너무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생활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해요.” 김PD의 별명은 ‘쌀집아저씨’다. 선량하고 푸근한 느낌의 외모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만든 작품 대부분은 ‘착하다’. 프로그램에는 담당 PD의 성격과 생각이 묻어나게 마련.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현실을 조명해서 0교시 폐지 논란에 불을 붙인 건 자신의 과거 학창 시절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는 늘씬한 여성들을 등장시켜서 희화화하거나 화면의 구성요소로만 쓰는 일도 안 하는데 그건 여성 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동심의 세계를 다룬 ‘전파견문록’은 김PD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투영돼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김PD는 가족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고 해외 출장을 가선 가족에게 수십 장의 엽서를 쓰는 등 가족 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이제 20대가 된 딸 현진(26)씨는 현재 고려대 국어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이고, 아들 정환(24)씨는 중국 관련 비즈니스 창업을 고민하고 있다.

 “가정을 꾸린 남자라면 남편으로 가장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말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일을 성공시키는 것도 결국엔 가족을 위한 것이죠. 아이들이 아빠를 원할 땐 같이 있어주고 놀아주는 것도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고요.”

미술을 전공한 아내와는 대학 4학년 때 만났다.

“원래 반포아파트 옆 집에 살았어요. 우리집은 407호, 처가는 408호. 제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서 처가를 우리 집인 줄 알고 들어가 처남 방에서 잠들어 버렸어요. 그때 처가 문이 열려 있었거든요.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새벽 2시에 오는 당시 고2 처남을 위해 장모가 아파트 문을 살짝 열어놨던 거죠.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가 여관은 아니고, 저 책상은 뭘까’하며 어리둥절해 있는데 장모님이 들어오시더군요. 옆집 학생이라 그냥 자게 뒀다고요. 그러면서 처남 과외 공부를 시켜달라고 하시더군요. 당연히 그러마고 했고, 그러면서 아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인디밴드 때문에 국장서 물러나
 

30년간의 PD 생활 동안 히트작도 많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가 방송사 최연소 예능국장으로 부임한 2005년 7월에는 한 인디밴드가 생방송 도중 성기를 노출한 ‘성기노출 사건’이 터졌고, 그해 10월 생방송 무대를 찾은 11명의 시민이 깔려죽은 ‘상주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국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1년 5개월 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재충전을 했다. 40일간 히말라야 산맥 등정도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더 힘든 일은 한다”는 게 그의 고난 극복법이다.


회장이니 국장이니 재미없어요, 현장이 좋아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언제나 다음에 만들 프로
한국에선 내 할 일 다해 중국서 새 역사 쓰고 올게요



 2011년 51세에 그는 ‘나는 가수다’ PD로 현장에 돌아왔다. 예능국장·한국PD연합회장 등을 거친 후였다.

 “회장이니 국장이니 재미없었어요. 그런 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 많을 겁니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죠. 회장이나 국장 일을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프로그램 만들라고 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요.”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노래 경연을 벌이는 예능 프로그램 ‘나가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김PD는 “노래보다 감동, 무대의 이면을 보여주는 게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였는데 그게 맞아 떨어졌다”며 “50세가 넘어서도 현역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도 기뻤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가수는 가수 김건모의 재도전으로 공정성 논란이 일었고, 결국 김PD의 하차로 이어졌다. 방송에서 하차한 그는 갈라파고스로 떠났다. 갈라파고스로 떠난 이유에 대해 그는 “갈라파고스는 진화론의 싹을 틔운 곳이죠.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어요. 진화의 역사를 둘러보면 생각이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이후 김PD는 2~3년간 중국을 오가며 중국판 ‘나는 가수다’의 총괄 자문으로 일했다.

 “중국의 제작 환경은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한국의 방송 제작 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톱 클래스지만 중국은 아직 아니에요. 하지만 인력이나 열의, 적극성 같은 건 우리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잊었던 것들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배운 게 더 많았어요.”


김재철 전 MBC 사장과 불화설?

그는 지난 4월 MBC를 퇴사하고 곧 중국에서 새 일을 시작할 예정이다. 3~4개 제작사들과 협의 중이다. 한때 김PD의 중국행을 놓고 김재철 전 MBC 사장과의 불화설이 떠돌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김재철 사장의 영향은 없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PD로서 내가 할 일은 다한 것 같습니다. 더 잘하는 PD들도 많고요. 이번엔 어마어마한 중국 시장에서 새롭게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MBC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중국 시장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중국에선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인지 묻자 그는 “내 작품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중국 사회를 위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 예능이 한국 예능을 뛰어넘을 가능성에 대해선 “중국인들의 열정과 자본력, 인력 등을 생각하면 한국 예능을 앞지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며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걸 두려워만 해선 한국은 발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발전의 기회이며 동시에 공존과 협력의 기회라고 봐야합니다. 국수주의적인 사람들 중엔 중국에 많이 가르쳐주면 안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안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들이 못 배우는 세상도 아닙니다. 서로 신뢰하고 믿는 단계가 돼야죠.”

 그는 PD라는 직업을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정의했다. 수많은 작품들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을 꼽아달라고 하자 “내가 다음에 만드는 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라며 “앞으로 4~5년 후 중국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 후 다시 만나 인터뷰하겠다”고 약속했다.

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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