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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백남준에게 창신동은 예술의 고향

1 부인 김복순씨와 둘째 딸 인애(11세에 병사)와 함께 서울 창신동 집 마루에 앉아 있는 박수근. 이곳은 박 화백의 살림집이자 작업실었다. 2 작가 백남준이 나고 자란 생가. 그 중 일부는 지금 백숙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3 박수근 화백이 살던 터의 현재 모습. 빗물이 흐르는 홈통만 당시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방앗간을 지나가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고, 햇살 내리쬐는 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을 감싼다. 특정한 장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느낌이랄까.

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화가 박수근(1914~65)에게 바로 그런 곳이었다. 강원도 금성의 본가를 떠나 6ㆍ25전쟁 때 월남한 그에겐 이곳이 제 2의 고향이었다. 북에 남겨두고 왔던 가족과 기적적으로 재회했고, 가족들과 함께 가난했지만 예술혼을 꽃피울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의 타계 50주기를 맞아 그의 대표작만 고르고 추린 특별기념전이 DDP에서 열리는 것 역시 같은 연유에서다. 이 동네 골목길을 오가며 보고들은 것들이 모두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4 동묘에서 설명하고 있는 유홍준 교수.
5 DDP 이간수문 전시장 앞에서 유홍준 교수가 문화유산 강의를 하고 있다. 6, 7 박수근의 ‘우물가’(1953ㆍ위)와 ‘유동’(1963ㆍ아래). 둘 다 창신동 풍경을 그렸지만 10년 사이 한층 간결하고 깊어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창신동 피란민 박수근, 창신동 99칸집 아들 백남준
전시는 과감하게 보폭을 넓혔다. 이간수문전시장에 대표작 50여 점을 걸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배경이 된 골목과 작업실 등 창신동 일대를 모두 전시 공간으로 삼았다. 9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11시부터 2시간 동안 이곳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답사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주제도 ‘창신숭인, 장소의 혼과 도시재생’ ‘창신동대문 봉제산업의 과거와 현재’ 등 다양하다. 중앙SUNDAY S매거진은 9일 첫 강연자로 나선 유홍준(66) 명지대 석좌교수와 함께 인문문화예술 답사를 떠났다.

“서울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쪽이 서쪽에 비해 기운이 약했어요. 낙산이 인왕산보다 기가 약한 거지. 그래서 흥인지문 인근에 성곽을 둘렀습니다. 사대문 중 다른 곳은 다 그냥 문인데 유독 동대문만 성곽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임진왜란ㆍ6ㆍ25 모두 적군이 동대문을 통해 입성했죠.”

유 교수는『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 저자답게 인문학과 문화유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어나갔다. 지리적 이유와 시대적 배경이 만나며 이곳은 신흥 재벌과 서민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동네가 됐다. 박수근처럼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온 피난민들이 새로이 둥지를 틀었고,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 같은 99칸집을 자랑하는 부자 중의 부자도 여기서 나고 자랐다. 유 교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을 통해 조선 영·정조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박수근과 백남준의 작품을 보면 20세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월이 흘러 배경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림의 흔적은 곳곳에서 재현됐다. 대표작 ‘길가에서’(1954)의 모델이었던 장녀 박인숙(71)씨는 추억의 장소와 물건을 만날 때마다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소녀 시절로 돌아갔다. 작업실 터 앞에 선 박씨는 “아버지 그림이 팔린 날이면 너무 행복했어요. 그날만 쌀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요. 다른 날은 밀가루를 뜯어 넣은 뜨데기국(수제비)이나 콩나물죽이 전부였죠”라고 회상했다. 가족이 함께 다니던 동신교회 앞에서도 추억 보따리를 한아름 풀어놓았다. “아버지는 음치셨는데 하모니카는 잘 부셨어요. 지금도 뻐꾸기 왈츠를 들으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그때 가수 조영남도 같이 교회에 다녔었는데 찬송가를 부르는 걸 듣고 있으면 영혼을 적셔주는 느낌이었어요. 얼굴이 못생겨서 눈은 감고 들어야 했지만.”

지금은 빈대떡집과 부동산 중개업소로 바뀐 이 곳은 ‘국민 화가’의 생활 터전이자 작업 공간이었다. 박 화백은 마루에 앉아 뛰노는 아이들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절구질하고 맷돌을 가는 아내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유일하게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홈통에 유 교수가 붓펜으로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고 적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았기에 대작보다는 소품이 많다”며 “60년대 들어 고착된 두꺼운 마티에르(질감)와 암각에 새긴 듯한 화법은 마치 종교화처럼 예술적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변화는 실제 작품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장에 나란히 걸려 있는 ‘우물가’(1953)와 ‘유동’(1963)을 보면 10년 새 선이 얼마나 얇아지고 질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한눈에 들어온다.

박 화백이 즐겨 그린 무대였던 시장 바닥은 완구 골목으로 재탄생됐다. 광주리를 이고 바닥에 주저앉아 과일을 파는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한 손은 엄마 손을 잡고 다른 손엔 장난감을 하나씩 쥔 아이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현미 도슨트는 “작품에서 빨래터나 시장 등 유난히 일하는 여인들이 많은 이유는 당시 남자들은 전사하거나 해외에 돈 벌러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성들의 고단함과 정겨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가족과 재회하자마자 그린 ‘장남 박성남’(1952)의 모델은 박수근의 아들이지만 실은 그 시절 잃었다 다시 찾은 모든 아들들과 다름없다. 작품마다 시공간적 배경이 만든 컨텍스트가 존재하는 이유다.

8, 9 창신동 완구골목을 오가고 있는 사람들. 과거 시장 풍경과는 사뭇 달라졌지만 여전히 행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곳이다. 10 백숙집 외벽 한 켠에 붙어있는 ‘예술가 백남준의 집 터’ 안내판.
백남준, 마지막 인터뷰서 “창신동에 가고 싶어”
답사단은 박수근 작업실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백남준 생가로 발길을 옮겼다. 당시 한 필지는 이제 22채로 쪼개져 다른 이들의 터전이 됐다. 백숙집 외벽 한 켠에 붙어있는 ‘예술가 백남준의 집 터’라는 안내판 앞에 서서 유 교수는 그와의 추억을 회고했다.

“70년 무렵엔 집에 TV도 없었는데 신문에서 비디오아트라고 해서 나는 백남준이 비디오를 발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83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환갑 기념 전시회에 한국 민중미술 발표자로 가 보니 전세계에서 큐레이터만 72명이 왔더라고요.”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그는 비보를 듣자마자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임에도 휴가를 내고 미국 뉴욕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백남준 선생 역시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창신동에 가고 싶다고 말했죠. 유년 시절 추억이 있는 공간을 무척 그리워 했는데 88년이 마지막 방문이 됐어요.”

창신(昌信). 전시 주최측은 번창과 믿음이라는 본 지명 대신 ‘창신(創新)’이라는 새 뜻을 가져다 붙였다. 박수근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의 장소혼이 서린 이 곳이 새롭게 재조명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숙씨는 “지난 시절을 담고 있는 아버지의 선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돋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장소가 예술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단언할 순 없지만 새 바람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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