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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반대한 6·3세대도 반일 민족주의에 빠지진 않았다

위 흑백사진은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초기인 1964년 3월 26일 중앙청 앞(현 광화문광장)에서 군경과 대치 중인 학생 시위대. 아래는 같은 장소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6·3 사태의 두 주역 김정남 전 수석(왼쪽)과 최장집 명예교수. 최정동 기자, [중앙포토]
다음달 22일은 한·일 협정 체결에 따른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근 악화일로인 한·일 관계를 반영하듯 양국 모두 별다른 기념행사 없이 조용하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외교의 최대 사건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외교공간을 확대하며 아시아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건 조국 근대화를 앞당긴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62년 오히라 외상과의 협상을 통해 청구권 관련 합의를 이끌어낸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고 밑천이 나올 곳은 대일 청구권뿐”이라며 이 돈으로 도로와 공장을 짓고 기술을 얻어 고도성장의 길을 열어가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한·일 양국은 1951년부터 수교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 교섭했다. 걸림돌은 과거사 문제 즉,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문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논리를 내세우면서 타협점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역사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봉인하고 경제협력 자금을 얻어내는 데 주력한 것이다. 김종필-오히라 메모(회담 결과를 양국 정상에게 보고하기 위한 양자 합의안 메모)로부터 실제 협정 비준까지는 3년이 더 걸렸다. 양국 정부 간 입장 차를 좁히는 것도 물론 쉽지 않았지만 정작 난항은 대내 교섭에 있었다. “굴욕적 회담을 중단하라”며 수교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세력이 가두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들이다. 당시 각각 서울대와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김정남(73)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김영삼 정부)과 최장집(72) 고려대 명예교수도 그때 광화문에 있었다.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 전 수석과 최 교수는 50여 년 전을 회고했다. “여기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앞에 모여서 청와대로 갈지, 을지로 내무부로 진격할지 정했지. 이젠 남아있는 게 거의 없네.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도 사라지고….”

 64년은 한·일 회담을 비난하는 대학생 시위로 연일 긴장이 고조되던 해다. 급기야 6월 3일 서울 18개 대학생 1만5000여 명 등 3만여 명의 시민이 광화문의 청와대 외곽 방위선을 돌파했고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점령했다. 이른바 6·3 사태다. 당시 김 전 수석은 ‘총파탄에 이른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은 자 과연 누구냐’는 내용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격문 등 시위 현장의 각종 선언문 작성을 맡았고, 최 교수는 필동 대한극장 근처의 한 개인 집에서 오히라와 회담 후 귀국한 김종필과 독대한 운동 이론가였다.

격렬 시위 덕에 협상 유리하게 이끌어
한·일 수교를 이끈 박정희와 김종필의 경제논리는 당시 서울 도심을 덮은 대학생의 운동논리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6·3세대는 역사 문제가 경제나 안보 논리로 봉합된 데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에서는 ‘제국주의자 및 민족 반역자 화형식’을 열고 ‘매국(賣國) 정상배(政商輩) 퇴진’을 외쳤지만 반일 민족주의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이는 김 전 수석이나 최 교수도 동의하는 바다. 대신 분단 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많은 이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김 전 수석은 “일본은 인류학적으로도 밀접해 가깝게 지내며 공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라며 “6·3 사태 당시엔 일본과 손을 잡는 게 분단 고착화로 이어질 거란 생각에 회담 자체를 반대했지만 결국 우리 시위가 한·일 회담 분위기를 한국 쪽에 유리하게 돌리는 데 일조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측이 격렬한 한국 시위를 보고 협상이 물 건너갈 것을 우려해 강경하게 나갈 수 없었다”는 원용석 당시 농림부 장관 말을 전하면서 말이다.

 최 교수는 진보적 성향의 민족주의 분위기를 이야기한다. 역시 국교 정상화를 분단 고착화로 가는 길로 봤다는 얘기다. 그는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이 시위의 주 동기는 아니었고 오히려 그때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이미 과거의 문제로 여겼다”며 “다만 당시엔 이대로 가면 통일이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과도 조율한 후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는 게 진정한 정상화라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아태 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안보 체제가 공고해진 결과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면 통일이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 그리고 북한도 교섭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반대시위의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불과 10여 년이 지난 때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일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최 교수는 김종필과의 독대에서 프랑스 핵 이론가 피에르 갈루아(Pierre Gallois)의 이론을 언급하며 국교 정상화로 한국이 냉전 핵 대결의 최전선에 나서게 돼 한반도가 핵전쟁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기억한다.

 박정희 정부나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 모두 큰 범주에서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다만 박정희 정부는 개발독재를 추구하는 보수적 민족주의였던 데 비해 학생 시위대는 시민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시 운동권에는 또 다른 반대논리가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 문제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청구권을 헐값에 팔아넘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6·3 사태는 한국 현대사를 점철해 온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 대결구도의 최초 사례라 할 수 있다. 김 전 수석은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두 주역인 민주화와 근대화 세력이 최초로 충돌한 사건”이라며 “회담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면도 있었고 산업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도 “쿠데타로 들어선 정부가 이 조약으로 안정화할 것이란 생각에 반대한 것”이라며 “당시엔 전부 부정적으로만 봤지만 나중에 세월이 지나 평가해 보니 일본과의 정상화는 필요한 일이었고,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자원이 된 자본 조달(청구권)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 가장 좋았던 때는 DJ 집권 초
앞서 언급했듯 60년대 거리의 반대세력은 역사청산을 정조준하여 대결하지 않았다. 광복 7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역사 문제로 일본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현실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에도 물론 대중 사이에 반일감정은 있었지만 일제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대학생 시위대는 반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일제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오히려 반일감정이 상승하고, 정부의 대일정책이 이에 휘둘리는 건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사회가 저항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영어학습 열기와 유학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다문화 가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혹시 3년째 대치하고 있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선친들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일감정이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의심의 눈길은 권력자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월 미 국무부 정무차관 웬디 셔먼은 “동북아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면서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도발적 행동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paralysis)를 초래할 뿐”이라 경고했다. 일본을 지지하고 한국과 중국을 비판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일외교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라는 얘기다. 지금 워싱턴에선 미국과 일본이 동맹의 새 장을 여는 글로벌 파트너십의 축배를 터트리고, 중국과 일본 역시 전략적 화해를 연출하는 동안 한국은 반일 민족주의의 덫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 전 수석은 “위정자들이 정치적 인기를 위해 반일 감정을 이용하다 오히려 격화된 대중의 감정에 휩쓸려 상황을 그르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6개월을 앞두고 독도를 방문한 건 독도 문제와 한·일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벼운 짓이며,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일본을 부끄럽게 만드는 전략이 필요한데 꽁하게 대립각을 세울 뿐”이라고 말했다.

 65년의 리더십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덫을 분명한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로 헤쳐나갔다. 2015년의 리더십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한·일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김대중 정부 첫해인 98년을 꼽는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처음으로 공식 문서화한 의미 있는 발표문이다. 당시 대일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부 동북아국장)는 박근혜 정부에 이렇게 조언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외교를 단절할 수는 없다. 경제교류와 초보 수준의 안보협력 등 제한된 수준의 협력이라도 유지하려면 외교채널을 복원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삼으면 복원이 쉽지 않다. 지금은 아베가 문제이긴 하지만 구조가 변화한 요인도 있다. 냉전 시대의 반공 연대나 일본에 대한 경제 의존은 과거의 구조다. 새 구조에서 남북통일이나 역내 평화번영을 위해 한·일이 공동으로 협력의 틀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김춘식 기자
 조 교수는 김 전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과거사 청산을 강조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해야 한다는 뚜렷한 일본관이 있었고, 그게 공동선언을 가능하게 했다는 거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이후 한국에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일왕에게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고, 일본은 ‘언제까지 반성을 요구할 거냐’며 줄다리기를 했다”며 “그래서 98년 당시 양국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소모적 논쟁 대신 반성과 사죄의 내용을 문서화해 더 이상 논쟁을 그만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했다.

 결국 한국 외교 위기론의 핵심에 있는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반일감정을 정면으로 다스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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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