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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북양함대의 치욕적 패배, 청의 몰락을 재촉하다

그림 1 미즈노 도시카타, 청 북양함대 제독의 모습, 1895년.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이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불타는 자신의 함선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장면이다.
그림 1의 배경은 1895년 2월 초이고, 주인공은 청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지휘하는 제독 정여창(丁汝昌)이다. 이 그림은 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였던 전투의 결과를 묘사한다. 청일전쟁의 격전장이었던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해전에서 청은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아시아 최고의 전력이라고 자부하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에 참패하자 정여창은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남은 전함과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다. 굴욕을 참기 어려웠던 그는 집무실로 돌아와 패전의 치욕에 몸서리치며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몇몇 부하 장군들도 뒤따라 죽음을 택했다. 일본의 화가 미즈노 도시카타(水野年方)가 제작한 이 우키요에(浮世繪)는 정여창이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불타는 자신의 함선을 마지막으로 돌아다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는 비장한 기운이 가득하다.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죽음을 택한 적장에 대해 화가가 나름의 경의를 표한 것이리라.

그림 2 고바야시 기요치카, ‘일본만세 백찬백소(日本萬歳 百撰百笑)에 실린 ‘전기충격을 당한 만주인’, 1895년. 청나라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미즈노와는 달리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은 청나라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적국을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그림 2는 같은 해에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清親)가 잡지에 실은 만평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구로부터 소개된 전기가 한창 보급되고 있었다. 전력회사들이 앞 다투어 설립되면서 전기의 놀라운 특성이 알려지던 시기였다. 화가는 서구기술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전기를 그림에 재치 있게 활용하였다. 말을 타고 칼을 든 모습의 청의 관리가 전기충격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청이 받은 충격은 실제로 대단했다. 일본이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빠르게 도입해왔고, 군사력을 키워 동아시아 패권국가로서의 청의 지위를 흔들어 온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청은 이미 1870년대에 타이완과 류큐(오키나와)에서 일본에게 통제력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우위를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조선 정치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자국의 지배력을 가시적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정세는 다시 요동쳤다. 농민운동의 확산에 위기를 느낀 고종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대응해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부터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아산만 앞바다, 평양, 압록강 어귀,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했다. 이즈음 서구 열강이 중재에 나섰다. 결국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시모노세키에서 종전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의 결과로 청은 일본에 배상금으로 거액 2억 냥(3억 2000만 엔)을 지불하고,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고, 조선 지배권을 후퇴시켜야만 했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은 청의 동아시아 지배권에 치명적인 충격파가 미쳤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본의 급부상에 서구 열강들은 긴장했다. 동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프랑스·독일 세 나라는 힘을 합쳐 일본에게 랴오둥반도의 영유권을 청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 ‘삼국 간섭’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던 일본은 하는 수없이 이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세 국가가 힘을 모아 일본을 압박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이제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머지않아 일본과 최종 승부를 겨루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림 3 앙리 마이어, ‘르 쁘띠 주르날에 실린 ‘중국, 왕과 황제들의 파이’, 1898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과 일본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청은 열강의 손에 자국의 이권들을 하나둘씩 빼앗기면서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산업화와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주변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갔다. 그림 3은 1898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만평이다. 앙리 마이어(Henri Meyer)가 그린 ‘중국, 왕과 황제들의 파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청나라 관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서 분노에 찬 표정을 지으며 서있고, 그 앞에 중국이라는 큰 파이를 둘러싸고 다섯 열강의 대표들이 앉아있다. 맨 왼쪽에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이 파이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려는 듯 손바닥을 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서 빅토리아여왕과 눈길을 부딪치고 있는 인물은 독일의 빌헬름 2세이다. 그는 자오저우 만(膠州湾) 지역에 칼을 박아 넣고 있다. 1897년에 독일은 자국 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을 핑계 삼아 산둥반도 남쪽의 자오저우 만을 무력으로 점령하고서 이듬해에 청으로부터 99년간의 조차권을 얻어낸다. 칭다오(青島)가 포함된 지역이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앉아있다. 그 뒤로 프랑스의 상징인 마리안이 유일하게 칼을 들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니콜라이 2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이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 간에 체결한 동맹을 상기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사무라이가 칼을 내려놓고 턱을 손에 괸 채 파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니콜라이 2세 앞에 있는 아서 항(Port Arthur)이라고 적힌 파이 조각에 꽂혀있다. 아서 항은 뤼순의 별칭이다. 러시아가 일원으로 참여한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이 청에 반환을 해야만 했던 랴오둥반도의 항구도시이다. 사무라이의 눈초리에서 이 땅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소유욕이 동시에 묻어난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심축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동시킨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청에서는 이미 아편전쟁(1840~42년)과 태평천국 봉기(1851~62년)를 계기로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홍장과 같은 관료들은 중국 전통의 가치를 유지한 채 서양 문물만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다. 군수산업이 육성되고 직물업, 교통업, 광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양무파 관료들이 중앙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채 분열된 상태로 각자 개혁을 추진한 까닭에 운동의 효과가 크지 못했다. 이런 약점은 청일전쟁에서 패배로 나타났다. 일본이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서구의 군사기술을 체계적으로 도입해 군대를 성공적으로 근대화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패전 이후 청에서는 서구문물의 도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정치·교육·사회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도 충분치 못해 청은 몰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일본은 거액의 배상금과 할양받은 영토를 이용하여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중공업을 육성하고 군비확충에 가속도를 냈다. 이는 앞으로 일본이 신흥 강자 러시아를 제압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이어서 만주와 중국으로 발을 뻗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의 상황은 헤어나기 힘든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청에 대한 우세를 보였으나, 곧이어 삼국간섭이 발생하면서 친러파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면서 다시 저울의 추는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기울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즉 ‘강압적 세계화’의 시대인 19세기 말에 한반도를 배경으로 쇠락해 가는 청, 기세를 올리고 있는 일본, 신흥 패권국 러시아의 세 나라 간에 피 말리는 두뇌싸움과 힘겨루기가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게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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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