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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감정 억누르고 살았던 미녀, 최선의 치유법은 솔직함

프랑스 영화 ‘미녀와 야수’(2014)의 한 장면. 레아 세이두가 벨을, 뱅상 카셀이 야수 역을 맡았다. 아래 작은 그림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
글을 쓰는 게 정말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모든 글에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내 상처나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글을 쓸 때는 도움이 된다. 상처를 표현하는 글을 쓰는 과정은 정말 부끄럽고 힘이 드는데, 막상 글을 쓰고 나면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때는 남산만 하던 고통이 막상 표현해 놓고 나면 콩알만 해진다. 겨우 이런 걸 갖고 10년 넘게 마음 고생을 했나 싶다. 글을 쓰는 순간 마음속 오랜 번민의 복잡한 소용돌이가 ‘텍스트’라는 형태로 객관화되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솔직할수록 더 큰 도움이 된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이건 내 얘기는 아닌데”로 시작하는 것은 많은 경우 자기고백의 소심한 대체제다.

『미녀와 야수』를 다시 읽으며 나는 여주인공의 진정한 매력이 바로 이 ‘솔직함’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여주인공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미녀 캐릭터 벨과 달리, 원작 소설의 미녀에게는 무려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어릴 때부터 조용한 책벌레였던 미녀는 질투심 많고 탐욕스러운 언니들에 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미녀에게 줄 장미꽃을 따기 위해 야수의 정원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네 딸을 데려오면 너를 살려 주겠다”는 협박을 받은 뒤, 미녀는 언니들과 오빠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구원자로 나선다. 조용한 은둔자였던 미녀가 용감한 투사로 돌변한다. 평소에는 아무도 그녀의 진가를 몰랐지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자 무의식 깊숙이 잠재된 그녀의 용기가 거침없이 분출된 것이다. “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라는 미녀의 초인적인 용기는 심약한 아버지는 물론 무서운 야수까지 끝내 감동시킨다.

고통스런 현실, 잊는다고 사라질까
그런데 자발적으로 야수의 성에 들어가 엉겁결에 동거하게 된 미녀가 야수와 벌이는 대화가 재미있다. 야수는 미녀에게 온갖 음식과 아름다운 옷들, 호화로운 장신구를 선물하며 구애하고, 매일 밤 미녀에게 묻는다. “내 얼굴이 추하지 않소?”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미녀는 뜻밖에도 “그렇다”고 말한다. 야수가 보여 준 뜻밖의 친절은 무척 고맙지만, 야수의 모습이 무섭고 추한 것은 사실이라고.

야수는 실망하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연민과 공포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면 야수는 더 크게 상처받거나 그녀를 해쳤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솔직함으로 인해 야수는 거짓 연민의 덫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녀에게 매일매일 더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치는 야수의 노력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자, 미녀는 말한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군요. 당신의 착한 마음을 알게 되니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이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가이드라인도 확실하다. 야수와 친구가 될 순 있지만 남녀로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저는 당신과 평생 결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제나 당신의 친구로 남을 거예요. 이것으로 당신이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미녀는 식구들과 있을 때보다도 야수와 있을 때 더 솔직하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 때문에, 혹시 언니들의 질투와 탐욕에 대한 원망을 숨기느라 자기감정을 제대로 분출해 본 적이 없었던 미녀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야수의 성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솔직한 미녀가 야수에게 휴가를 허락받자 자기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만다. 일주일만 아버지 곁에 머물기로 했던 그녀가 열흘이 넘게 지체하며 야수가 자신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부정(denial)의 방어기제인데,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현실로부터의 탈출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하는 것이다. 야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가 자신을 목숨 걸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는 것이야말로 야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결핍 온전히 받아들여야 승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는 방어기제를 유형화하고 어떤 방어기제를 쓰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도 했다. 방어기제 중 가장 성숙한 태도는 바로 승화(sublimation)다. 승화는 퇴행·합리화·투사 등 여타의 방어기제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억압이 아닌 발산을 통해 욕망을 표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야수의 사랑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미녀는 야수에게로 달려가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는다. 미녀가 돌아오지 않는 줄 알고 굶어 죽기로 작정한 야수가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심장이 비로소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당신은 죽지 않아요. 살아서 저의 남편이 되셔야죠. 아, 전 단지 당신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믿었는데, 제가 느끼는 이 고통을 보니 이제 당신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아요.” 야수에 대한 공포의 감정이 사랑의 감정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때 거짓말처럼 사방에서 불꽃놀이의 폭죽이 터지고, 무서운 야수는 늠름한 왕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승화는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내가 모자라고, 나쁘고, 상처를 받고, 타인을 아프게 했음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 완전한 받아들임(radical acceptance)이 가능할 때 비로소 승화가 시작될 수 있다. 미녀와 달리 질투심 많은 언니들이 구원은커녕 처음보다 더 상황이 나빠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받아들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미녀가 형편이 어려워진 아버지를 돕기 위해 힘들게 집안일을 돕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식으로 험담을 한다. “우리 막내 좀 봐. 그 애는 천한 영혼을 지녔어. 그렇게도 멍청하니까 이 불행한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거잖아.”

언니들은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했을 때는 아버지의 돈으로 유세를 떨더니, 동생이 괴물의 아내로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동생의 불행을 기뻐한다. 그런데 불행할 줄 알았던 미녀가 야수의 호화로운 성에서 사랑받으며 살자 이번에는 또 미녀의 행복을 질투한다.

“왜 막내가 우리보다 더 행복한 거야? 왜 우리는 막내만큼 사랑스럽지 않은 거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막내를 일주일 넘게 이 집에 잡아두는 거야. 그러면 바보 같은 야수는 분노로 날뛰겠지. 막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지. 괴물이 막내를 집어삼킬지도 몰라.”

어떻게 친동생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언니들은 이토록 사랑스러운 막내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자신의 모자람, 자신의 잘못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고 점점 퇴행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어리석은 언니들은 마침내 야수의 저주를 받아 성을 지키는 석상으로 둔갑하고 만다.

느리지만 궁극적 해결책이 된 방어 기제
이렇듯 어떤 방어기제는 파괴와 자멸을 초래하고, 어떤 방어기제는 구원과 기적을 가져온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정하고 퇴행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당장은 편하고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또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승화하는 것이 힘들고 느리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 오랜 금언인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문장에서 나는 전략(policy)을 치유(therapy)로 고쳐 보고 싶다. 솔직함은 처세술이나 성공 전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로서 더욱 소중한 치유의 기술이니까.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지 못한 고통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정여울 문학 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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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