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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樂] 산 너머가 그립지만 떠날 수 없을 땐…

시골교회 목사 출신 시인이자 화가인 임의진이 편집한 ‘여행자의 노래’ 음반 시리즈. 7집까지 나왔다.
초록빛이 여행 유전자를 자극한다. 매일 아침 차창 넘어 들어오는 5월의 푸르름이 출근길을 버겁게 한다. 회사를 스쳐 지나 ‘이 땅이 끝나는 곳에서 뭉게구름이 되어’ 보고 싶은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충동, 매번 상상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도 직장인에겐 주말이 있다. 며칠을 참고 기다린다. 초록비를 맞아 채도가 한참 높아진 숲길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오늘은 마음 단단히 먹고 여행가방을 싼다. 짐 쌀 때 1순위는 역시 남들처럼 기본 생활도구들이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양말들. 약간의 간식도 넣어둔다. 생각만큼 읽지는 못하지만 책을 빼놓으면 서운하다. 무게가 많이 나갈 때는 날렵한 시집 한 권이면 족하다. 이제 거의 다 정리했다. 하지만 진짜가 아직 남았다. 내겐 어떤 여행길에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음악 파일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귀차니즘 때문에 종종 CD 리핑(포맷 변환 복사)이나 다운로드를 잊곤 한다. 거기에는 여전히 물성을 가진 매체를 좋아하는 몹쓸 성향도 한 몫 한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습관이다.

결국 여행 당일날 아침, 컨베이어벨트처럼 시간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던 여행 짐 싸기가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CD장 앞에서 이창호나 이세돌이 된 듯 장고에 들어간다. 이 때 만큼은 아내가 쇼핑몰에서 이 상점 저 상점, 이 옷 저 옷을 들여다보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말러는 여행길에 너무 무겁지 않을까? 바흐는 독주곡을 들고 가나? 아니면 협주곡? 클래식만 들고 가면 그것도 좀 지루하겠지?’ 재즈도 몇 장, 록 음반도 몇 장. 이미 손에는 십여 장의 음반이 들려 있다.

이렇게 1차 선택된 CD 중에 최근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탈락하지 않은 음반이 있다. 개인적 취향이긴 하지만, 감히 최근 10여 년간 나온 모음집 중 으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녘 시골교회 목사 출신인 임의진(작은 사진)이 고른 월드뮤직 ‘여행자의 노래’ 시리즈다. 2003년 첫 음반이 나온 이후 지난 해 가을까지 모두 7장이 나왔다. 음반을 채우고 있는 노래들은 출신국부터 장르까지 야생화만큼이나 다양하다. 마치 음반으로 만나는 뉴욕 유엔사무국 직원식당 풍경 같다. 매 음반마다 전통 있는 전주의 한정식 식당처럼 미감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악들이 한 가득히 차려져 있다.

메인 요리는 포크계열의 담백한 음악들이다. 그러나 이 장르를 말할 때 떠오르는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사이먼 앤 가펑클 같은 원조 포크 스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스웨덴이나 러시아의 자작나무향을 담은 음악이 있고, 고원의 바람소리를 담은 몽골이나 안데스의 음악이 있다. 햇살 좋은 여행길에서 만난 그리스의 작은 미녀나 꽃을 팔고 다니는 자유로운 집시처녀들과도 음악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다. 물론 가까운 일본의 철학하는 포크 가수 사이토 테츠오나, LP 콜렉터들의 사랑을 받는 김두수나 인디언 수니 같은 한국 음악가들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음반을 선물하는 임의진도 한 두 곡 노래를 한다. 아무래도 포크 장르의 장점, 즉 탁월한 가창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 참여가 아닐까 싶다. 높은 고음보다 느낌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여행자의 노래’ 시리즈는 산 너머를 그리워만 하고 있는 나 같은 좌절한 여행가를 위로하는 음반이다. TV를 틀 때마다 나오는 수많은 세계여행 프로그램이 시각의 대리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이 시리즈는 완전히 귀를 위한 것이다. 다른 점은 TV 프로그램이 낯선 도시의 풍물이나 신기함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음악으로 만나는 여행은 여행길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해서 길 위에 있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언젠가는 당신도 이 길 위에 서있으리라는 희망의 전주곡인 셈이다. 특히 내게는 이 시리즈의 수록곡들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명품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금장 헤드폰을 끼고 듣는 음악이 아니다. 낡은 가방을 메고 만 원짜리 이어폰을 서로의 귀에 한쪽씩 꽂아 주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노래이다.

세계 각지에서 들려오는 진실한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삶과 역사가 스며든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연상하게 된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노래하는 이들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종종 해외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다른 노래도 찾게 된다. 어떤 때는 제대로 된 영상을 찾기 힘든 경우도 꽤 있었다. 쇼비즈니스계로 바뀐 음악계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음유시인들인 셈이다. 이들이 하는 음악에는 진정성의 힘이 있다. 그 힘 덕분에 쎄시봉을 추억하는 중장년층 음악팬이나 인디포크계열의 나지막한 감성을 좋아하는 젊은 음악팬들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다. 또 사진작가 김홍희가 찍은 앨범 자킷과 멋진 여행 사진은 덤이다.

‘쿵쿵쿵….’ 아이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다. CD를 고르다가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 손에는 아직도 12장의 CD가 있다. 선택의 곤란함을 해결해주는 건 아이들과 아내의 한 톤 올라간 원성이다. “이제 그만 가요, 제발. 아빠! 기다리기 힘들다고요.” 양손 가득 든 CD를 한번 바라본다. 눈에 밟히는 너 댓 장만 들고 급히 방을 빠져 나간다. “어어… 간다, 간다고.” 여행 가방에 담긴 CD 중에 ‘여행자의 노래’가 늘 들어 있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엄상준 KNN방송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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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