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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는 미래 위한 제안에 모아져야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국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미국에서 ‘한국 피로감’이 퍼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이 한·중·일 관계 그리고 한·미·일 관계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다는 논평이 들린다. 한·중·일의 평화적 연대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 연대를 위한 관계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큰일이 아닐지 몰라도 유감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소외에는 ‘한국 피로감’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피로감은 현실 관련이 약하면서 되풀이되는 일에서 생기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떼를 쓰며 칭얼댈 때 갖기 쉬운 것이 감정적 피로감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판단과 관계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돌보는 사람이 아이의 안녕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는 증표일 수도 있다. 각도를 달리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이가 아이기 때문, 즉 아이가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아이가 왕의 자식이라면 보모가 왕자의 칭얼댐을 모르는 채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에 불만을 계속 표하고 있는 것이 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피로감’도 한국 외교 소외의 원인
위안부 문제가 사과를 요구할만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과를 거부하거나 피해가는 경우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는 것일까? 강제할 힘이 없는데 사과의 당위성을 느끼게 할 방도가 있는 것일까? 사적인 관계라면 이 힘은 사과해야 할 사람이 마음 깊이에서 느끼는 회한(悔恨)의 힘일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자각에 관계된다. 이 자각은 잘못을 범한 자로 하여금 사과 요구가 나오기 전에 사과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사과는 힘의 관계에서 나오는 결과로, 참으로 의미 있는 사과라 할 수 없다.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서 도덕적 진정성의 동역학을 쉽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도덕성의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포괄적인 현실 이해의 밑에는 일정한 도덕의식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오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과 미래의 현실 상황을 검토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앞으로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면 거기에는 도덕적 고려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정치에서도 그러하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최소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최대한의 목표가 되어 마땅한 것은 평화이다. 평화스러운 삶의 조건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은 삶의 귀중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따라야 하는 규범이 도덕이다. 거꾸로 도덕적 규범은 그럴만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살아 작용하는 원리가 된다. 한·일 관계, 한·중 관계, 한·중·일 관계, 그리고 여러 국제 관계에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는 어떻게 하여야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적어도 국제 관계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현실에 대한 큰 물음의 일부가 될 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중·일이 공동의 평화와 공동의 번영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데에 합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합의가 쉬운 것일 수는 없다. 현시점에서 한·중·일은 이해관계, 그리고 오늘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을 달리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합의를 위한 제안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틀 안에서 우리의 주장 또는 호소는 다른 나라들을 포함하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제안과 호소가 될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한·일 간 쟁점의 하나는 그것이 강제 동원이냐 인신매매냐, 동원이 정부 권력에 의한 것이냐 매춘업자들의 영업행위냐 하는 것이다. 범죄란 전통적으로 국가의 법 체제 안에서 정의되는 것이지만 2차 대전 후의 국가 관계에는 국가 주권을 넘어서 규정한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한 서구 학자의 설명을 따르면 그것은 “법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 기구가 수없이 많은 다른 기구·단체·담당자·관리·사업가·시민의 보조를 받아 저지른 범죄” 일체를 말한다. 여기에 강간이나 성노예화, 강제 매춘 등도 포함된다. 이것은 다시 정부 권력을 돕는 모든 단체와 개인의 행위가 범죄로 정의될 수 있고 그 책임은 권력 주체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위안소가 일본군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범죄 또는 범죄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면 책임의 문제를,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의 경우처럼 보다 넓게 파악하는 도덕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는 국제 관계에 등장한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개념이다. 이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 주권을 넘어 인간 모두를 하나의 법률 체제 안에 거두어들이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서 인간은 모두 하나의 공동체 속에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광범위한 법과 도덕규범이 모든 사안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아니한다.

국가 권력의 강제가 있든 없든 전쟁 지역에서 위안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 전쟁과 강제의 문제를 떠나 한국과 일본에서 성에 대한 규범이 전통적으로 그 엄격성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는 것도 두 나라 입장의 차이에 개입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강제적 성격에 대하여서는 어느 쪽에서나 이제는 부정적 판단이 따를 것이다. 여성운동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여권 의식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전 인간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 비교적 근래에 인정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전쟁을 보는 눈도 시대와 더불어 달라져서 이제야 그것을 보다 넓고 높은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전쟁론』을 쓴 카를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에 “전쟁은 수단을 달리하여 정치(또는 정책)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전쟁은 무조건적인 폭력과 잔학행위가 아니며 따라서 정치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클라우제비츠의 말에는 전쟁 자체에서는 그 무자비한 수단에 어떤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있다. 그가 말하는 바 전쟁이 정치의 일부라는 것은 정치가 내세우는 합리적 목적을 위해서는 전쟁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는 전쟁을 당연한 정책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이러한 통상적인 이해를 넘어 전쟁 없는 세계를 생각해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마저도 유럽 여러 나라 사이의 전쟁을 전혀 이상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 또는 그 자체를 규탄하지 않으면서 전쟁이 없는 체제를 구상해보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서양에서 대체로 전쟁을 당연한 국가 관계의 일부로 보는 심리는 많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전쟁 중의 범죄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범죄행위로 보는 입장도 일반화 되어가고 그것에 맞추어 ‘전 인간에 대한 범죄’와 같은 개념도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현실 파악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
필자는 일본의 전통적 전쟁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다만 일본에는 봉건 영주들이 전쟁을 마다하지 않던 전국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평정 상태에 이른 다음에도 일본은 무사계급이 사회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사회였다. 거기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일부로 생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전통에는 전쟁을 정치 전략의 일부로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면 전쟁, 그리고 원자폭탄의 막대한 피해를 경험하고 난 후 전쟁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전쟁에 대하여 우리와는 생각을 달리했고 또 그로 인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쟁에 따른 비인간적인 사건들에 대하여도 느낌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전쟁을 이성적 정치 수단의 일부로 본 클라우제비츠까지도 전쟁 자체의 무자비성을 시인하였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물론 전쟁 수행 시의 전사들의 행동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자비성이 전쟁의 내용이 된다면 그것은 전장(戰場)에만 한정되지 않기가 쉽다. 최근 영국 BBC 방송 홈페이지에 ‘베를린의 강간’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이야기되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베를린과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이 저지른 강간이다. 그 희생자는 베를린에서만 10만, 독일 전역에서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간 이러한 사실들은 여기저기의 여러 문서에서 드러났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밝혀진 것은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이다. 소련군 병사였던 블리디미르 겔판트의 일기는 여기에 대한 현장 기록의 하나인데 아들이 그것을 발견하여 올해 말에야 출판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BBC 기자의 글은, 규모가 달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강간이 독일에 진주한 연합국 그리고 소련에 진출한 독일군에 의하여서도 자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의 차이나 전쟁에 따른 참혹상같은 것들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보다 큰 현실 관련 속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의 현실이고 이 현실 파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이다. 동아시아, 또는 더 넓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평화와 번영의 미래이다. 전통의 차이나 오늘의 이해득실의 차이는 이 미래에 대한 비전 속에서만 지양될 수 있다.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분노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제안 속에 수렴되어야 한다. 그 미래는 단순히 우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그리고 세계 전체를 포함한다. 필요한 것은 관계국들이 이러한 비전을 공유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이 테두리에서만 위안부 문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국내외 정치, 현실 정책에 더 가까워져야
이러한 당면 문제와 그 테두리의 문제는 국내 정치에도 해당된다. 분노와 적대 감정의 격발은 우리 정치의 동력이다. 그것은 누구나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래가면 그것은 우리를 질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정치 피로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분노와 적대 감정의 격돌이 현실 문제의 현실적 해결에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과 미래의 현실은 정책에 의하여 간추려진다. 최근 공무원 연금, 국민 연금을 두고 벌이는 여야와 정부 간 갈등은 국민의 삶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것의 잘잘못에 대한 여러 시비가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 관계되는 정책의 논의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어쨌든 이제는 정치가 조금 더 현실 정책에 가까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내외 어느 정치에나 두루 해당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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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