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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장칭’ 뒷담화 보고서, 훗날 피바람 진원지

딸 리나(李納)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마오쩌둥(오른쪽)과 장칭(가운데). 1944년 봄, 옌안. [사진 김명호]
한동안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장칭(江靑·강청)과 결혼한 것은 ‘실패한 선택’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마오나 장칭의 주변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은 동의하지 않았다. “권위를 자랑하는 서적마다 이런 주장을 반복한다. 장칭이 중국인을 불안하게 만든 건 문혁시절이었다. 마오쩌둥은 1930년대에 장칭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남녀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변하게 마련이다. 연애를 시작할 무렵 마오는 중국혁명의 영수였고, 장칭은 상하이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한 진보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이상할 게 없었다. 주석이 장칭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영수의 이미지와 당의 이익을 내세우며 결혼에 반대한 사람들도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다.”

1938년 가을, 마오쩌둥은 장칭과 결혼을 결심했다. 장칭을 못마땅해하는 정치국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하이 지하당에 지시를 내렸다. “구 사회의 건달들과 어울린 배우 출신이다. 남녀 관계도 지저분할 정도로 복잡하다. 주석은 이 점을 잘 모른다. 행적을 상세히 파악해 보고해라.” 못된 소문만 골라서 보고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상하이 중국공학 재학 시절의 왕잉.
상하이 지하당은 장칭에 관한 소문 수집에 나섰다. 연예계 인사를 찾아 다니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장칭과 가까운 줄 알았던 영화계의 재녀 왕잉(王瑩·왕형)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하당원들은 영화계가 얼마나 살벌한 판인지 잘 몰랐다. 훗날 줄초상을 몰고 올 보고서를 옌안(延安)으로 보냈다. 보고서는 마오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왕잉은 당시 여배우 중 별종에 속했다. 혁명 만화가 딩충(丁聰·정총)의 회고를 소개한다. “왕잉은 용모가 단정하고 소박했다. 전혀 연예인 티가 안 났다. 분 냄새 풍기고 다니는 배우들과는 격이 다른, 영화계의 황후감이었다. 평론가들의 의견도 일치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학교를 다닌 덕에 영어도 유창했다. 상하이 예술대학과 푸단대학, 명문 중국공학에서 희극과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미국 여류작가 펄 벅도 왕잉을 찬양하는 회고를 남겼다. “그냥 배우가 아니었다. 탁월하고, 아름답고, 겸손했다. 게다가 훌륭한 희극가이며 빼어난 작가였다. 중국의 우수한 여인들을 대표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장칭과 라이벌이었지만 티를 안냈다.” 대 화가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추앙 받는 여장부”라며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

1932년을 기점으로 중국 영화계는 좌회전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보니, 현실을 소재로 한 영화가 환영을 받았다. 경영난에 봉착한 제작자들은 왼쪽을 두리번거렸다. 좌익 영화는 새로운 스타 발굴에 나섰다. 질질 짜는 역이나 소화하던 여배우들은 신여성 기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높은 학력과 인상이 좋은 왕잉을 놓치지 않았다. 열일곱 살 때 중공에 입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딱이라며 무릎을 쳤다.

1933년 상하이 영화계는 70여편을 시장에 내놨다. 그 중 40여 편이 좌익영화였다. 왕잉이 주연을 맡은 영화는 제작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왕잉은 ‘비구니 스타’였다. 기자들의 방문을 거절하고, 촬영이 없는 날엔 영화사 출입도 안 했다. 방문 걸어 닫고 독서에만 열중했다. 사회 명사라 일컫는 사람들의 초대도 한 귀로 흘렸다. 유행하던 댄스홀에도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저렴한 남색 옷을 걸친 평범한 여대생 모습이었다. 짙은 화장에 농염하고 묘한 분위기 풍기는 여배우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같은 해에 장칭도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장칭은 여류화가 위펑(郁風·욱풍)과 한 방에 하숙하며 왕잉과는 친자매처럼 붙어다녔다.

왕잉은 상하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펄 벅의 초청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왕잉의 빈자리는 장칭의 몫이 아니었다. 대신 왕잉이 거절하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호사가들일수록 여자 문제에 입이 싼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장칭의 이름이 남자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중앙문혁 제1부조장 시절의 장칭(가운데). 왼쪽은 장칭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조장 캉셩(康生).
귀국한 왕잉은 1935년 ‘자유신(自由神)’으로 화려하게 영화계에 복귀했다. ‘자유의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 이 영화에서 장칭은 단역을 겨우 따냈다. 포스터에 자신의 이름을 써달라는 간절한 요구도 거절 당했다.

독기가 없으면 남자값에 못 드는 것처럼, 질투를 할 줄 모르면 여자가 아니다. 장칭의 왕잉에 대한 질투는 ‘자유신’을 계기로 시작됐다. 30년 후 짜릿한 보복을 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68년, 우리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중앙문혁 간담회 비슷한 것이 열렸다. 장칭을 제외한 전원이 서명한 서신을 마오쩌둥과 린뱌오(林彪·임표)에게 보냈다. “1937년 장칭이 상하이의 잡지에 기고한 글을 최근에 발견했다. 꼼꼼히 읽어본 참석자들은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장칭은 30년대에 이미 무산계급 혁명가로 손색이 없었다.” 서신을 읽은 마오쩌둥은 결재를 의미하는 동그라미를 그린 후 몇 자 첨가했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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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