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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의 ‘생각의 역습’] 친절한 안내자와 교묘한 유도자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상황에서 기존에 설정돼 있는 디폴트 옵션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몇 가지 옵션을 고를 수 있는 선택화면이 뜨는데,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다면 대부분 디폴트 옵션을 선택한다.

해당 프로그램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설치옵션을 선택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이미 설정돼 있는 디폴트 옵션을 선택하지 않아 잃을 수 있는 손실을 더 크게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디폴트 효과는 매우 강력해서 단순히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보험상품을 선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다음을 보자.

A. 보장범위는 넓지만 비싼 보험
B. 보장범위는 좁지만 값싼 보험

A와 B는 보장범위와 보험료라는 두 가지 기준에서 장단점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다 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보험에 가입하려고 할 때 A와 B중 하나가 이미 디폴트 상품으로 설정돼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옵션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더라도 디폴트 상품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실제로 1992년 미국 뉴저지 주 자동차 보험의 디폴트 상품은 보험료가 저렴한 상품(B)으로, 가입자가 원하면 비용을 더 지불하고 보장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반대로 펜실베이니아 주는 보장범위가 넓고 보험료가 비싼 자동차 보험(A)을 디폴트 상품으로 제시하고, 가입자가 원할 때만 보장범위를 줄여 보험료를 줄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두 주 가입자들이 선택한 보험상품을 조사한 결과 뉴저지에서는 80%, 펜실베이니아에서는 75%가 디폴트로 설정된 보험상품을 선택했다.

디폴트 효과는 좀 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선택에서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장기기증에 대한 의사결정은 단순한 손익개념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과 종교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다. 과연 가치관과 종교관이 개입되는 선택에도 누군가 제시한 디폴트 옵션에 영향을 받을까. 결론은 ‘그렇다’이다. 다음을 보자.

A. 영국·독일·네덜란드·덴마크
B. 프랑스·오스트리아·벨기에·스웨덴

A와 B는 모두 유럽국가다. 그러나 A 국가 국민의 장기기증 동의율은 4~27%인 반면, B국가는 85~99%로 높았다. 유럽 내에도 종교·문화·인종 같은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에 의하면 장기기증에 대한 동의율 차이는 그러한 변수로 설명되지 않았다.

동의율이 낮은 A 국가들은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 것을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한 후 본인이 원하는 경우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도록 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반대로 동의율이 높은 B국가들은 본인이 특별히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한 장기기증 의사가 있는 것을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결국 정부에서 설정한 디폴트 옵션에 따라 장기기증 동의에 대한 국민의 선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에 직면하면서 매 순간 눈 앞에 놓인 옵션들을 비교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선택에서 내 앞에 놓인 디폴트 옵션이 과연 최선의 대안인지 살펴보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결국 디폴트 옵션은 제안자 입장에서 내가 선택해 주길 원하는 옵션이기 때문이다. 주의력이 결핍된 선택이란 마치 디폴트라는 등대에 의지하는 조각배와 같다. 친절한 안내자라 여겼던 등대가 교묘한 유도자일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한 디폴트인지 자문하라.


최승호 도모브로더 이사 james@brodeu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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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