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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중고생에게 매혈 권하는 사회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밤 기차를 탄다/피를 팔아서(이하 생략)’.



 1976년 ‘창작과비평’에 실린 정호승 시인의 시 ‘매혈’ 도입부다. 피 팔려고 서울대병원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담은 전민조의 사진 ‘매혈인파’(1975년)에서도 볼 수 있듯 가난했던 70년대엔 호구지책으로 피 팔아 돈 버는 매혈(賣血)이 흔했다. 먹고살 만한 지금은 사라졌으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여전히 매혈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창 성장하는 중고생들 사이에서 말이다. 다만 40년 새 매혈의 목적이 돈 벌기에서 점수 따기로 달라졌을 뿐이다.



 중고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금세 눈치챘겠지만 바로 봉사 점수 얘기다. 96년 봉사활동을 입시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헌혈이 종합생활기록부의 봉사활동 항목으로 처음 인정받았다. 당장 중고생들이 무더기 헌혈에 나섰고, 오랫동안 부동의 1위였던 군인을 제치고 학생이 그해 헌혈자 1위로 올라섰다. 헌혈하는 사람 4명 중 1명이 고교생일 정도였다. 특히 2010년 7월 이후 헌혈 1회당 봉사시간을 4시간이나 인정해주면서 2011년엔 전체 헌혈 인구 중 학생 비중이 57.4%까지 뛰었다. 최소 연 15~20시간을 채워야 입시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데, 헌혈 한 번으로 4시간을 바로 채울 수 있으니 너도나도 헌혈에 나선 것이다. 헌혈 한 번은 10페이지(A4용지 기준)의 번역 봉사와 맞먹는 수준이다. “헌혈은 사실상 점수따기용 매혈”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가 헌혈에만 유독 이렇게 관대하게 봉사시간을 인정해주는 건 교육적 목적과도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96년 헌혈을 봉사활동으로 인정할 당시 “학생들이 제대로 봉사하는 대신 편리한 대안만 택하게 만드는 비교육적 처사”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교육부는 헌혈을 봉사항목에서 제외할 것을 검토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거꾸로 학생들의 헌혈 봉사를 더욱 장려하고 있다.



 교육적 차원의 봉사활동이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솔직한 이유는 국내의 혈액난 때문이다. 부족한 혈액을 손쉽게 채우려고 만만한 학생을 동원한다는 얘기다. 물론 헌혈은 수많은 봉사활동 인정항목 중 하나일 뿐이고, 정부가 헌혈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살인적인 입시경쟁에 시달리느라 늘 시간에 쫓기는 중고생들이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헌혈의 교육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교육부 지침에 부연설명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교육부 관계자는 “행정자치부와 보건복지부 지침을 따랐을 뿐”이라며 “가급적 국가가 만든 표준안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냐”고만 했다. 교육청·교육부 어디에서도 학생을 위한 입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최악의 입시지옥을 겪는 학생들에게 나라의 부족한 피까지 공급하라니, 어른들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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