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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네팔 대지진과 비렌드라 국왕의 비극

지난 4월25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부터 80km 떨어진 곳에서 진도 7.8의 강력한 대지진으로 카트만두와 인근 농촌의 피해가 엄청나다. 특히 카트만두 어디에서도 보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건축물인 다라하라(빔센)탑이 붕괴되어 처참한 잔해만 보여 주고 있다. 9층 높이의 이 탑은 1834년 완공되어 100년 후인 1934년 대지진에서도 살아남아 탑의 머리에 장식되어 있는 힌두 시바(Shiva)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언론을 통해 카트만두 중심부가 폐허처럼 무너진 것을 보면서 지금부터 30 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연수를 끝낸 후 귀국하여 아주국 서남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81년 여름이었다. 서남아과는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을 담당하는 지역과이다.

다음 해인 1982년 가을에 아랍에미리트(UAE)로 발령받아 나갔기 때문에 인도와 네팔을 담당한 나의 서남아과 근무는 불과 1년을 좀 넘긴 기간이었다. 서남아과 근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네팔에 대한 것이다. 네팔은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별로 없고 해발 8000m의 고산으로 둘러싸여 한 때 외국인의 입국도 거부했던 은둔자의 나라(hermit kingdom)였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라는 초강대국 사이에 끼여 지정학적 어려움이 많은 것도 우리와 흡사하였다.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하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등 우리의 귀에도 익은 세계의 10대 최고봉 중 8개가 포함되어 있어 알피니스트의 메카이고 일반인에게도 생애 한번은 꼭 가봐야 하는 동경의 나라였다.

네팔에는 ‘어머니와 모국은 천국보다 위대하다(Mother and motherland are greater than heaven'라는 말이 있다. 천국보다 멋있는 네팔이 지금 지진의 피해가 크고 수많은 사람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파묻혀 목숨을 잃었다. '지진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너진 건물이 죽인다( Earthquakes do not kill people, buildings do)'라는 지진 전문가의 말이 상기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구호금을 내고 구호 팀을 보내 네팔을 도왔다.

그 중에도 인도와 중국의 구호활동이 눈에 띈다. 보도를 보면 중국의 인민해방군 청뚜(成都)군구 배지를 단 군인들이 구조에 직접 나서고 있고 ‘란텐(藍天)구원대’라는 푸른 제복을 입은 구조대가 내시경 카메라 같은 기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건물 잔해 깊숙이 집어넣어 매몰된 사람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AIIB)을 통한 일대일로(一帶一路 바다와 육지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이번 대지진으로 파괴된 도로 교량 등 네팔의 인프라 재건을 포함 시킬 것으로 보인다.

인도는 헬리콥터 13대를 동원 의료팀과 구조대를 신속히 보내 구조 활동을 돕고 있다. 네팔에 부족한 헬리콥터는 교통이 마비된 산간지역을 이어주는 효과적 활동하고 있다. 인도는 이번 기회에 왕정 폐지이후 중국에 가까워진 네팔을 역사 종교 문화의 오랜 연관성을 강조 관계개선의 의욕을 보이는 것 같다. 네팔은 인도와 함께 대표적 힌두교 국가이다. 네팔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과 인도의 지원경쟁을 끌어내는 모습이다.

내가 서남아과에서 근무할 때에는 즉위 10년을 맞이하는 비렌드라(1945-2001) 국왕이 네팔을 통치하고 있었다.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던 비렌드라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폭 넓은 지지와 신망을 받고 있었고 대외관계에서도 중국과 인도를 고루 방문 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도 잊지 않았다.

당시 나는 수첩 속에 비렌드라 국왕의 사진과 함께 ‘인도에 항복하는 것보다 국민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 (It's better to surrender to the people rather than surrender to India)'라는 국왕의 글귀도 적어 두었다. 네팔의 처지가 조선왕조 말기에 백성을 무시하고 당쟁을 일삼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와 비슷해 이 말에 끌렸다. 비렌드라 국왕은 영국 이튼 칼레지에서 공부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개명군주였다.

서남아과에서 비렌드라 국왕을 알게 된 때로부터 꼭 20년이 되는 2001년 6월, 나는 해외 근무를 마치고 다시 외무부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때 비렌드라 국왕 가족의 비극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비렌드라 국왕은 아이슈와라 왕비와 함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왕세자가 난사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세계 왕조사에 유례가 드문 네팔왕실대학살사건(Nepalese Royal Massacre)이다.

범인인 왕세자 디펜드라(1971-2001)는 내가 처음 서남아과 근무 때는 10살의 애 띈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디펜드라 왕세자는 30세 나이의 청년이 되었다. 2001년 6월1일 저녁 나라얀히티 왕궁에서는 왕족들의 정례 만찬이 열렸다. 왕세자는 부왕과 어머니 왕비와 언쟁을 하였다. 왕세자가 좋아하여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를 부모가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집안은 왕비 가문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앞으로 왕비가 될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난 디펜드라 왕세자는 술에 잔득 취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후 나타난 왕세자의 손에는 소총과 기관단총이 쥐어져 있었다. 네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왕세자는 총기에 익숙하다. 그는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라 왕비 그리고 왕자(남동생)와 결혼한 공주(여동생)를 차례로 살해하고 다른 왕족을 5명을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의식 불명상태로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병상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왕이 되었다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6월4일 사망한다. 가장 짧은 ‘3일 국왕’이다. 디펜드라 국왕이 죽자 그를 섭정한 삼촌 갸넨드라가 새로운 국왕이 된다. 갸넨드라는 마침 지방출장으로 왕실 만찬에 참석치 않아 생명을 구했다. 왕실대학살 사건에 갸넨드라 가족의 피해가 거의 없어 형인 비렌드라 국왕과 의견이 맞지 않은 갸넨드라의 궁중 쿠데타라는 루머도 있었다.

새로운 왕이 된 갸넨드라는 형과 달리 절대군주제를 지지하여 민주화 의식이 높아진 네팔 국민과 대립하게 된다. 국민들이 갸넨드라 국왕에게 등을 돌리면서 산악과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왕정타파를 내세운 마오이스트(Maoist)와의 내전이 격화되고 국토를 서로 양분할 정도로 반군의 기세가 드높았다.

2006년 4월 갸넨드라 국왕의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 궐기로 ‘네팔의 봄(Loktantra Andolan 국왕 없는 민주화 운동)’이 왔다. 국왕 갸넨드라의 정치적 특권이 박탈되면서 10년을 끌었던 내전도 종결되었다. 이어서 2008년 제헌의회에서는 왕정폐지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네팔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고 공화국(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이번 네팔 대지진은 인도판(Indian plate)이 유라시아판(Eurasian plate) 아래에서 밀어 올려 일어났다. 더구나 카트만두 계곡은 수 천만 년 전 호수의 밑바닥 퇴적물이 융기한 지형이라 흔들림이 더 심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예고된 지진인데 미리 대비를 못하고 속절없이 당한 것도 내전에 의한 정국의 불안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날이 휴일(토요일)이라 학교 건물이 무너졌으나 학생들의 희생은 없었다고 한다.

네팔의 국명이 그 곳에 사는 ‘네와르(Newar)’ 민족에서 유래된다고 하지만 히말라야 수호신(神 Ne)의 보호(pal)를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지금 네팔에는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전 세계의 구호의 손길이 닿고 있다. 국내에서는 3만에 가까운 네팔 출신이 살고 있다. 그들과 함께 네팔을 위해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악조건에서 '신의 보호(Nepal)'를 믿고 꿋꿋이 살아 온 네팔의 복원력(resiliency)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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