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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디, 책상에 발 올린 채 “미국 왜 왔소?” …“혁명 설명하러 왔다” 소파에 벌렁 누운 JP

1962년 11월 3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 노스롭을 시찰한 뒤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의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한국 공군이 도입할 초음속 전투기 F-5A를 시승했다. 오른쪽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 김두만 장군. 이날 JP는 F-5A를 타고 6만 피트 상공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2년 10월 23일 나는 미국 워싱턴DC에 도착했다.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의 공식 초청으로 간 것이다. 육군 대위로 미국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조지아주)에서 유학한 지 10년 만에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미국 땅을 다시 밟았다. 혁명정부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얻는 게 나의 방미 목적이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1> 미국의 리더들과 대좌하다
JP, 포트베닝 유학 10년 만에 방미
행정부 실세 로버트 케네디 면담
“미국에 구걸하러 온 것 아니다 … 원조 안 받기 위해 혁명한 것” 열변
자세 고쳐앉은 케네디 “뭘 원하나” … 헤어질 땐 저서 『내부의 적』 선물도



 애초엔 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는 날 쿠바사태로 미국과 소련 간 전쟁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신 국무장관(딘 러스크), 상무장관(루더 호지스), 육군참모총장(얼 휠러), 국무부 정책기획위원장(월트 로스토), 국방부 차관보(윌리엄 번디) 등 주요 인사를 만나게 했다. 그중 실세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RFK) 법무장관이었다.



 쌀쌀했던 10월 26일 오전 나는 정일권(丁一權) 주미대사와 함께 미 법무부 건물을 찾아갔다. 장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법무장관실로 향했다.



 로버트 케네디와 악수를 나눈 뒤 나와 정일권 대사는 소파에 앉았다. 로버트는 소파가 아닌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더니 책상 아래쪽 서랍을 하나 빼서 그 위에 두 발을 올려놨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미국에 왜 왔소?”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기분이 나빴다. ‘잉여농산물이나 잔뜩 달라고 떼쓰려고 온 것 아니냐’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당시 극빈(極貧)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PL 480호(미국의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에 따라 미국에서 남는 농산물을 무상으로 들여와 식량을 보충해야 하는 여건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자식 봐라. 너희 형인 대통령이 너하고 얘기하라고 해서 여기 온 건데, 왜 왔느냐는 게 말이 되느냐’고 생각했다. 애써 참고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왜 왔는지 얘기하겠다. 내가 미국에 돈 내라 식량 내라, 그런 구걸을 하려고 온 게 아니다.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먹고살 것을 만들 거다. 내가 온 건 왜 혁명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당신 형을 만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미국엔 전부 구걸하려는 사람들만 오는 줄 아느냐?” 나는 목청을 높였다. 로버트는 시치미를 떼고 “그 일이 잘 안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안 되면 되는 날까지 요구를 하고 이해시키고, 그것밖에 없지 않겠느냐. 혁명을 이해시키러 왔는데, 이해가 안 되면 이해할 때까지 내가 얘기하겠다”고 되받았다.



 로버트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전히 두 발을 책상 서랍 위에 얹어놓은 채였다. 성질이 오른 나는 보란 듯이 소파에 일자로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당황한 정일권 대사가 “그러면 안 됩니다. 여기가 어디인데 그럽니까. 일어나세요”라고 말렸다. 나는 정 대사에게 소리 지르듯 말했다. “저걸 보세요. 내가 아무리 약소국에서 왔지만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일이 있습니까. 저 녀석이 자세를 바꾸면 나도 일어납니다.” 우리말로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로버트가 눈치를 챘다. 그제야 그가 다리를 내려놓고 서랍을 집어넣더니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그걸 보고 나도 똑바로 앉았다. 그러곤 우리 셋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로버트는 나를 시험해본 거였다. 내 반응이 상상 이상이어서 그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1964년 방한한 로버트 케네디 미국 법무장관(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면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때부터 진지한 대화가 시작됐다. 로버트가 “무엇 때문에 혁명이다, 쿠데타다 평하는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사를 할 때부터 생각했던 대로 대답했다. “언젠가는 미국과 같이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고 민주적으로 영위되는 그런 국가를 만들려고 혁명을 했다. 미국에 원조해 달라고 손 벌리지 않는 나라, 너희 나라에 짐이 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게 목적이다.”



 이 대답에 나를 보는 로버트의 눈이 달라지는 듯했다. 그가 “요구할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한국에 있는 1600명가량의 미국 경제협조처(USOM) 직원을 반으로 줄이고 그 남는 재원으로 실질적인 원조금액을 늘려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 해 2억 달러를 원조해 줬지만 USOM 직원 봉급 등을 빼고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한참 못 미쳤다. 또 다른 요구는 잉여농산물 주는 시기를 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양곡이 필요한 건 보릿고개로 불리는 4~6월 춘궁기(春窮期)인데 미국은 농산물을 자기들 편의에 따라 10~11월에 보냈다. 나는 “급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원조가 될 수 있도록 원조 방식과 시점을 전부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로버트도 “그렇게 하겠다. 원조라는 게 필요할 때 맞춰 손에 들어가야 하는데 관례를 따르다 보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동의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로버트는 서가로 가더니 자신이 쓴 책 『내부의 적(The Enemy Within)』 한 권을 가지고 왔다. 내 이름의 영어 스펠링을 묻더니 책에 서명을 해서 내게 줬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신이 한 말을 다 이해했고 형(케네디 대통령)에게도 보고하겠다. 지금 쿠바사태가 위급해 형은 거기에 대처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잘못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3차 대전을 하더라도 소련을 눌러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각오를 하고 있다.”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이 미군의 해상봉쇄선 바로 앞에 멈춰 서서 대치하던 바로 그때였다. 우리의 면담은 예정된 15분을 훌쩍 넘겨 45분간 이어졌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로버트 케네디는 명석한 인물로 케네디 행정부의 실력자였다. 형 케네디 대통령도 중요한 일은 모두 상의할 정도였다. 로버트는 64년에 한국에 왔을 때도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와 첫 만남에서 ‘아, 그냥 적당히 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이후 로버트 케네디와 나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18일간 방미를 계기로 나에 대한 미국 지도층의 인식이 조금씩 고쳐졌다. 5·16 직후부터 미국에선 나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인물’로 보고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미국으로선 혁명을 주도한 내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다크 호스’였다. 내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마자 민주당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꾸몄던 미 CIA 요원 크래퍼(가명)와 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이었던 위태커를 붙잡아 미국으로 추방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 내가 그들의 눈에는 반미주의자나 급진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로 보였을 것이다. 미국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미국에 해(害)가 될 수도 있다고 나를 판단한 듯했다. 일개 중령 출신이 뒤에서 혁명정부를 움직이고 있는데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미국 측의 대표적인 반JP 인사가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였다. 그는 줄곧 나를 감시하고 견제했다. 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버거 대사와의 갈등이 고조됐다. 미국 대사관에서 잉여농산물 공급을 중단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보릿고개를 앞두고 양곡 원조가 갑자기 중단된다면 큰일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버거 대사를 찾아갔다. “미국대사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럴 수 있느냐. 원조를 위해 선박으로 실어다 갖다 놓고 왜 밀가루를 풀지 않느냐”고 소리 지르며 따졌다. 그렇다고 미국 측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정면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항의해온 일은 없었다. 버거 대사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나를 제거하라고 설득했다는데, 내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었다. 박 의장이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나에게 바로 전했을 것이다. 버거 대사는 외교관이지 모사꾼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 71년 10월 국무총리 시절, 나는 월남을 방문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돼 한창 싸우고 있던 때였다. 그곳에서 주월 미국 부대사로 있던 버거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버거는 내게 “그땐 내가 한국 사정을 잘 몰라 당신을 의심했다. 마음으로부터 사과하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 보니까 당신이 수고를 많이 했다. 월남에 파병해서 미국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국력을 키우지 않았느냐. 계속 소신껏 해 달라”고 덧붙였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을 뿐 결국 그도 나를 이해하게 됐다.





● 인물 소사전  로버트 F 케네디(1925~68)=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의 동생으로 미국 진보적 지식인의 우상이었다. 하버드대 출신 변호사로 상원위원회 법률고문을 지냈다. 1961년 1월 케네디 행정부 출범과 함께 36세 나이로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JFK 암살 뒤인 64년 11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지만 68년 형처럼 총격을 받아 암살됐다. 가톨릭 신자로서 11명의 자녀를 뒀다. 워싱턴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의 JFK 옆에 묻혔다. 애칭은 바비(Bobby), 이니셜은 RFK.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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