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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사랑해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바야흐로 애정이 꽃피는 시절이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청첩장을 보면서 누군가는 “봄엔 황사만 오는 게 아니구나”라며 농 같지 않은 농을 던진다. 나 역시 가벼운 호주머니에서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축의금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긴 하다. 그래도 어여쁜 청춘들이 저마다 짝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봄날 꽃구경보다 더 흐뭇하다.

 얼마 전 꽃 같은 새색시가 된 후배가 고맙다며 찾아왔다. 부조 얘긴가 했더니 아니었다. “부장께서 무조건 착한 남자 만나라고 하셨잖아요. 신랑이 ‘훈남’은 아닌데 정말 착해요.” 듣자 하니 그 남자, 연애 시절 야근이 잦은 후배를 위해 차에서 졸며 기다리길 밥 먹듯 했단다. “나는 바담풍(風) 해도 너는 바람풍(風) 해라”라더니 평소 남자 외모 꽤나 따지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후배는 바른 길로 이끈 모양이다.

 무릇 얼굴 뜯어 먹고살 것 아니니 착한 게 최고란 어른들 말씀은 만고의 진리일 게다. 그것 말곤 어떤 짝을 골라야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란 동화 속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1999년 국내에서도 개봉된 ‘런어웨이 브라이드(Runaway Bride)’다. 우리말론 도망친 신부쯤 될까. 톱스타 줄리아 로버츠가 세 번의 결혼식 도중 줄행랑을 치고 네 번째 신랑은 식도 치르기 전 딱지를 놓는 악명 높은 처녀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녀를 취재하러 간 신문 기자가 숨겨진 진실을 밝혀낸다. 힌트는 바로 계란 요리. 남편이 될 뻔한 남자들에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계란 요리가 뭐냐?”고 물었더니 스크램블드 에그와 오믈렛, 삶은 계란이라고 각기 다른 답을 내놓은 거다. 우리 식으로 치면 남자 취향 따라 진밥을 좋아했다 된밥을 좋아했다 한 셈이다. 사랑 때문에 식성까지 바꿔버린 그녀. 하지만 결혼 서약을 앞두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느낌에 번번이 달아나게 된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가는 건 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도 소싯적엔 책 많이 읽는 남자를 만나면 덩달아 독서에 열을 올렸고, 헤비메탈 매니어와 사귈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록카페를 들락거렸다. 닥치는 대로 읽어둔 책이 교양을 조금은 높여줬을 테고, 한때 록음악에 탐닉했던 것 역시 해가 됐을 리 만무하다. 이렇듯 소중한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건 사랑의 미덕 중 하나일 터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문제다. ‘그가 원하는 나’를 위해 ‘진짜 나’를 잃어버린다면 사랑을 얻는다 해도 행복은 손에 쥘 수가 없는 거다.

 뉴욕 여자 4명의 성과 사랑을 그린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전 던진 교훈도 바로 그거였다. 유방암 치료 탓에 머리가 빠져 우울해하는 서맨사를 위해 기꺼이 삭발을 감행한 연하남 스미스. 난생처음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 그를 따라 그녀는 오랜 터전인 뉴욕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의 삶은 진짜가 아니란 걸 깨닫자 그녀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뉴욕으로 돌아간다.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난 나를 더 사랑해.”

 사랑과 행복을 모두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짝을 만나란 얘기다. 욕심을 좀 더 부리면 미래의 내 모습까지 아껴줄 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결혼 10년 차를 훌쩍 넘긴 한 후배가 술자리에서 연애 시절 40㎏대이던 부인의 몸무게가 지금은 70㎏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흉을 보는 게 아니었다. 힘이 세져서 혼자 가구도 척척 옮기는, 씩씩한 현재 모습도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거다. 남녀 불문하고 모름지기 이런 짝을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 철학자 니체는 “남자를 사랑하려면 미리 도수 높은 안경을 써두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20년 후의 그이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 일생이 평안할 거다.”

 아까 영화 얘기로 되돌아가면 그녀는 문제의 신문 기자 덕에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계란 요리가 베네딕트(수란을 머핀에 올려 먹는 음식)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해준 그 남자와 무사히 결혼식을 올린다. 아마 두 사람은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있을 것이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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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