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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통에도 공부는 꼭 하거라” 책 챙겨 아들만 피란 보낸 어머니

전쟁 중 서울 거리의 전시(戰時)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한 어린이가 교과서를 읽고 있다. 1953년 6월 5일 종군기자 워런 리가 촬영했다. [사진 박대헌(완주 책박물관 관장)]
매 순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 와중에도 학교는 학생을 뽑아 교과서를 나눠주고 시험을 치르며 가르쳤다. 목숨이 위태롭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지만 제도권 교육이 나름 제 기능을 했다는 얘기다. 여기엔 한국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이 한몫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숱한 증언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사교육의 대부’인 하늘교육 서진근(80) 회장의 어머니는 6·25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막내아들을 혼자 피란 보내면서 생필품 대신 어렵게 구한 수학책 한 권만 들려 보냈다. 기약 없이 헤어지는 아들에게 “전쟁 통에 혼자 살아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아들은 피란 내려온 경동고 교사들이 부산에 세운 임시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상당 기간을 방 안에서 어머니가 준 수학책을 읽고 또 읽으며 홀로 공부했다. 그 책이 어머니에게, 아니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서 회장 모자가 대단히 유별난 게 아니다. 정도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당시 많은 어머니는 전쟁이라는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식 교육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시절 사람들에게 배움은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자극제와도 같았다.

한국전쟁 직후 수업 중인 교실 풍경. 칠판 위에 태극기와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책상 가운데 구두닦이통이 보인다. [사진 박대헌(완주 책박물관 관장)]
전쟁 전 못지않았던 피란지 수업
노태우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윤형섭(82) 명지대 석좌교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경복고 2학년이었다. 한국전쟁 이듬해인 1·4 후퇴 때 낯선 땅 대전으로 피란 가 가족을 부양하느라 온갖 막노동을 다 하면서도 끝내 학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피란 내려온 지 1년쯤 지나니 대학에 간다는 동창 소식이 들려오는 거야. 이 난리통에 누구는 대학을 가는데 나는 아직 막노동이라니, 뿔이 났지. 마침 대전에 내려온 학교 교사이던 아버지에게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하니, 내 손을 잡고 대전종합고에 데려다 주시더라고.”

 전쟁 통이라 수업을 대충하지 않았을까. 그건 순전히 요즘 사람들 편견이다. 윤 교수는 “시설은 열악했지만 모두 마룻바닥에 앉아 선생님 설명을 듣고 열심히 꾹꾹 눌러썼다”며 “동급생 81명 중엔 공비 토벌단도 섞여 있을 정도로 출신이 제각각이었지만 미적분, 독일어도 배우는 등 수업의 질(質)은 경복고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히려 선생님들은 더 열정적이었다”며 “여든 넘은 지금도 고시조를 달달 외는 건 전적으로 대전종합고 10개월간의 학습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인들은 당장 내일의 생사도 불확실한 와중에 왜 그리 공부에 매달렸을까. 한국인 특유의 민족성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생존을 위한 처절하고도 매우 현실적인 몸부림도 있었다.

 윤 교수는 “당시 지역별로 ‘병사구(兵事區) 사령부’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서 병적 관리를 했다”며 “대학에 떨어지면 불합격자 명단이 병사구 사령부로 넘어갔고 곧바로 입대 영장이 나왔으니 이 시험이 대학이냐 군대냐의 기로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군대 가면 무조건 죽는다는 생각이 팽배한 시절이었으니 다들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윤 교수는 “아직도 어떤 문제가 출제됐는지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50년대 대학생 병역면제 혜택은 대학 진학을 급증하게 만든 한 요소로 작용했다.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문제인·김세중 편)에 따르면 한국전쟁 와중에도 정부는 대학 교육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 연기조치’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대학생은 입대가 유보되고 대학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것으로 대체됐다.

전쟁 중 발행된 교과서. 왼쪽부터 초등학교 『셈본 1-2』(1952) 앞표지와 뒤표지, 『중학국어 1-1』(1953), 『고등한문 1』(1952).
교사 월급 절반을 학부모가 부담
50년대 전반기는 전쟁 탓에 교육의 암흑기가 된 게 아니라 거꾸로 고등교육이 팽창하는 시기였다. 대학생 징집연기만큼 고등교육을 확장시킨 또 다른 원인은 농지개혁이었다. 농지개혁으로 땅을 뺏길 처지에 몰린 지주들은 미리 교육재단에 자신의 토지를 기부했다. 지주의 후원 속에 기성회가 발족하면서 사립대학도 덩달아 급팽창했다. 60년대 들어서는 사립대 학생 수가 국공립대 학생 수에 비해 네 배나 많았다.

 이렇게 50년대는 전반적으로 한국 교육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였다. 대표적인 게 학제다. 51년 3월 교육법 개정으로 국가 공교육의 기간학제는 6-3-3-4 단선형으로 정착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등의무교육도 이때 마련됐다. 50년부터 6개년 계획을 세워 진행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늦어져 54년 시행됐다. 50년대 지출된 교육 재정을 보면 의무교육비에 지출된 예산이 전체 문화교육부(현 교육부) 예산 가운데 무려 60∼80%를 차지했다.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초등의무교육이 뿌리를 내린 셈이다. 부모의 열의와 정부의 노력이 더해져 50년대 말 초등학교 취학률은 거의 100%에 이르게 된다.

 흥미로운 건 당시부터 치맛바람이 거셌다는 점이다. 국가 재정의 부족이 주요인이었다. 중·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조차 학부모의 부담은 교육재정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이른바 ‘수익자 부담 원칙’이었다. 학부모로 구성된 후원회는 학급 증설이나 학교 신축 등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

 후원회는 52년부터 사친회(師親會)로 바뀌었다. 사친회는 학교 운영에서 학부모의 재정부담을 제도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교사의 봉급도 사실상 사친회가 절반을 책임졌다. 53년 중등교육 재정표에 따르면 공립의 경우 52%, 사립은 56%가 사친회비로 구성됐다. 사친회 지원이 없었다면 사실상 학교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부모 호주머니를 털어 50년대 학교가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당시 정부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쟁 직후인 54년부터 5개년 계획에 따라 농한기에 70~90일간 한글은 물론 계산 능력과 초보적 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 시행됐다. 교사와 대학생뿐 아니라 부인회 등 비정부단체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00만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는데, 그 결과 50년대 말 성인 인구의 80%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백낙준 장관, 제도권 교육 단절 막아
한국 부모의 교육열은 전쟁을 겪었던 과거나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지금이나 똑같이 뜨겁다. 그때의 교육열은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북돋워 개인의 성공뿐 아니라 한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의 교육열 역시 후세에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으려면 50년대를 다시 돌아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윤 교수는 확고하고 올바른 교육철학을 갖고 일관되게 실행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어떻게 목숨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선배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특히 백낙준(1895∼1985) 문교부 장관의 공이 크다. 취임한 지 50여 일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백 장관은 ‘아무리 비참한 전쟁 중이라도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는 철학이 확고했다. 51년 2월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발표·시행해 제도권 교육이 단절되지 않게끔 민첩하게 대응했다.“

 이승만 정부가 전쟁 발발 후 개편한 피란처별 종합 중·고가 대표적인 예다. 인문계·상업계·공업계를 다 합쳐 지역별로 ‘종합’ 학교를 정부가 운영했는데, 학교에 못 다녀 노는 사람이 없게 하자는 취지였다. 심지어 대학도 연속성을 유지했다. 연세대는 부산, 고려대는 대구로 피란 갔는데 소속 학생이 그리로 모두 따라갈 수는 없기에 거점지역 전시연합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점을 따면 소속 대학 학점으로 인정해줬다. 전쟁 중이었지만 각 도에 국공립 대학을 신설하기까지 했다.

 윤 교수는 “현재 교육 시스템이 50년대를 넘어서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더니 “내가 보기엔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의 학생 선발권은 지금보다 더 확고했다. 내신성적 위주의 입시제도도 실시했다. 고등학교가 입시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는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교육 지도자들은 미국 출장길에 오르기만 하면 종이를 얻어왔다. 그걸로 교과서 찍고 책을 만들었다. 궁핍해도 후세대를 위한 교육열이 사뭇 비장했다. 과연 그런 간절함과 열망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가. 누구를 탓하기 앞서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 그 의지를 북돋고 실천하게 만드는 환경을 갖추는 것일 게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인내와 노력이 내일의 도약을 이루는 씨앗을 움트게 했다는 걸 50년대 한국이 증언하지 않았는가.


최대석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장,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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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