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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생존자는 단 2명 … 콜로세움의 결투 닮은 프로 입단전

입단대회를 통과한 세 명의 얼굴. 천풍조 9단, 노영하 9단, 고(故) 전영선 8단(왼쪽부터)이 덕수궁에 모였다. 1968년. [사진 한국기원]
“너무 초조한 나머지 초반에 3연패를 당하고는 눈앞에 캄캄했다. 네 번째 대국부터 담담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판 한 판 승부에 집착없이 두어나간 결과… 침착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점점 더 흥분되어 초조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1977년 4월 입단한 허장회(60) 9단의 입단 소감이다. 그는 본선리그에서 3연패 후 9연승 했다. 친구인 고(故) 임창식은 10승2패를 기록, 1위로 입단했다. 9승3패의 성적을 올린 자가 3명이라, 다시 3인만의 리그를 치렀다. 2승. 천신만고 끝의 입단이었다.

바둑 한 판에는 대략 230수가 소요된다. 한 수 한 수마다 초조감이 쌓이는데 그것이 230번. 그런 바둑을 입단대회 본선 기간 5일 내내 10~12판 두어야 한다. 다들 말한다. 입단대회 본선리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긴장감을 준다고. 절망은 희망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겪는 감정. 수준이 닿지 못하면 절망은 아예 없다. 목표에 가까이 갈수록 희망과 절망이 대조되는 법이다.

1 조치훈은 11살에 입단했다. 일본 바둑 사상 최연소였다. 고(故) 기타니 레이코 6단, 고(故) 기타니 미노루 9단, 조치훈 9단(왼쪽부터).
바둑 인구 늘며 10대 입단자 드물어
62년 9살의 조훈현(62·9단)이 입단했다. 겨우 9살, 입단이 그리 쉬운 걸까. 고(故) 강철민 9단은 58년 19살에 입단했고 홍종현(69) 9단도 64년 대학 1학년에 입단했다. 강철민은 서울대 상대, 홍종현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10대 입단이 드물어졌고, 서울대 출신 입단자도 찾을 수 없다. 60년대와 달리 수준이 크게 높아진 데다 일본책이 많이 번역되면서 공부할 게 많아진 때문이다. 69년 애기가 100만, 72년 200만. 79년 300만~400만 운운했다. 프로 지망생이 많아져 경쟁은 치열해졌고 입단은 어려워졌다.

아마 강자에게 프로 입단은 절대적인 명제였다. 프로가 되지 못하면 프로기전 참가는 고사하고, 권위도 없으며 생활 기반도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입단을 고시 합격과 비교하나,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경쟁이다. 물론 입단도 10년 공부가 필요하고, 고시도 중·고 6년에 대학 4년을 생각하면 10년은 되겠다. 하지만 고시는 평균 점수가 합격선만 넘으면 되는 데 반해 입단은 일종의 결투였다. 70~80년대 봄·가을에 각각 입단자를 두 명씩 뽑았다. 격투사를 모두 방 하나에 밀어넣고 두 명만 나오게 하는 방식.

입단대회 참가비는 5000원~1만원이었다. 짜장면 대여섯 그릇 정도 값이다. 실력 약한 사람은 참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입단대회엔 강한 1급들만 전국에서 모인다. 100~150명 정도. 보통 1급을 서너 점 접을 수 있는 실력이다. 일반 아마추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원에서 오래 지내면 구부러진 등, 숙인 머리가 보통이지만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는 그렇지 않다. 실력에 자부가 들어가 자세가 다르다.

대회를 앞두고는 입단 유망자가 점쳐진다. 지난 1년 전국대회 입상 성적이 가장 큰 기준이다. 그리고 세미프로들이 운집하는 기원에서 최근 성적이 좋은 1급들이 물망에 오른다. 바둑의 세계는 좁았다. 어느 분야든 주제가 잡히면 좁아지는 법이다. 유망주로 꼽히면 부담스럽다. 내면에 타인의 평가가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다. 입단대회 때 의외의 인물이 왕왕 예상을 깨고 입단하는 이유다. 신인은 부담이 없다. 마음껏 둔다.

입단대회는 풍성한 잔치 분위기 같았다. 서울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 1층 유전다방은 평상시 40~50대 문화계 인사들로 채워지지만 이때만큼은 20대 청년들로 북적였다. 중원장·원산정 등 주변 음식점과 밤비 등 경양식집도 열흘 정도 호황을 누렸다.

예선 대국장은 5층의 큰 대국장 하나로는 모자라 3층 일반회원실을 이틀 정도 빌려 썼다. 1, 2, 3차 예선을 먼저 조별 리그로 치른다. 4~6명의 조에서 단 한 명을 다음 단계로 올려 보낸다. 3차 예선은 특히 험난했다. 한 판이라도 지면 1등은 물 건너간다. 1등만 본선에 올라간다.

10~12명이 치르는 본선 리그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두 명이 입단하기에 한 판 지더라도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대개 2~3패 정도면 입단한다. 그렇지만 한 판 한 판이 살얼음이다.

2 1977년 4월 제44회 입단대회에서 입단에 성공한 고(故) 임창식(왼쪽)과 허장회. 열흘간의 대회를 거쳐 임창식은 1등, 허장회는 2등으로 통과했다.
낙방하면 또 1년… 돌 놓는 손가락 덜덜
까짓 거 할 수 있다, 내가 못하면 말도 안 된다. 이런 분발이 내면에 있어야 하지만 맘 만으로 되지 않는다. 내 바둑도 중요하지만 경쟁자의 성적도 중요하다. 경쟁자의 성적이 신경 쓰일 때 고통은 커진다. 한 판 두 판 두어서 7~8국에 다다르면 희망은 구체적이 된다. 유력한 경쟁자를 이겨야 하는 승부판은 있는 법이고 승부판을 넘기면 입단이 눈앞에 잡힌다.

그래도 무사히 리그전을 마치기란 참으로 어렵다. 입단이 불가능한 자들도 양보하지 않는다. 시드가 있기 때문이다. 3~5위를 하면 다음 대회 본선 진출 자격을 준다. 져 줄 수 없다.

전패자(全敗者)는 져 줄까. 아니다. 적당히 두어서 지면 입단이 가능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라 누구에겐 이기고 누구에겐 져 준다는 게 부담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적당히 두면 기백이 사라진다. 오늘 바둑을 그리 두면 6개월 후 입단대회에서도 패기 있는 바둑을 두기 힘들다. 실로 바둑에서 이것만큼 진실한 사실이 없다. 져 주면 져 준 사람에게는 다음에 만났을 때 ‘절대’ 못 이긴다.

전패자가 허리춤을 붙잡고 두면 입단이 걸린 쪽은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떨리기 때문이다. 서로가 친밀하다면 적당히 두기도 한다. 져 준다면 담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드물지만 “한 판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인간사에 나쁘다고 할 것만은 아니다. 우린 약한 존재다. 의지만 강조하면 어리석을 수 있다. 통찰력만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어려운 분위기 하나만 살려보자. 입단이 가까워지면 돌 놓는 손가락이 떨린다. 돌에 땀이 찐득하게 베인다. 예외 없다. 지금 두는 이 착점이 행여 잘못된 곳에 놓이는 게 아닐까, 걱정은 천만가지다. 담배 한 대 피우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낙방하면 다시 1년이다. 6개월 후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1년이다. 그 어두운 터널.

기보 허장회(흑)의 입단 결정국이다. 박상돈의 백3이 나약한 수로 곧 패착이 되었다. 피차 이기면 입단이라 착점이 얼어붙은 게 분명해 보인다. 4에 젖혀야 했다.
기보는 77년 봄의 입단 결정국이다. 허장회(흑)의 기세에 백이 무너졌다. 백3이 이해하기 힘든 점. 당연히 4에 젖혀야 했다. 우변 백A 급소가 있어 백이 잡힐 말이 아니다.

입단이 결정되는 리그 다섯째 날은 파장 분위기가 역력하다. 탈락한 사람들은 아쉽고 저 홀로 억울해서 힘이 빠진다. 비유를 해보자. 적지 않은 이혼자들이 ‘아차’ 싶을 때가 이혼 당일 저녁이라고 한다. 미처 예상 못한 곤혹이다. 그처럼 갈 곳 막막해지는 심정이 곧 탈락자의 마음이다.

참가비 5000원 못구해 애태우기도
70년대 한국 사회는 바둑에 힘을 실어주었다. 남산공전과 충암고·배문고는 바둑 특기생을 두었다. 바둑을 전문으로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편의를 봐주었다. 야구부처럼 운영했고 장학금도 주었다.

프로의 세계는 정직했다. 실력으로 두었고 실력으로 성적을 냈다. 많은 소년들이 프로를 지망한 이유로, 노력만큼 실력이 오고 실력만큼 성적을 낸다는 것을 꼽았다. 어느 사회든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분화할 때엔 공정한 룰(rule)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법이다.

입단을 목표로 하는 청년에게는 시(詩) 한 편 읽을 시간이 없다. 그럴 여유는 누구도 없었다. 입단은 절박한 문제였다. 조개로 투표해 추방을 결정하는 오스트라시즘(ostracism)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에선 최고의 형벌이 공동체로부터 내다버려지는 것, 곧 추방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입단하면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고 못하면 추방되는 것과 같다.

다들 고독하고 서러웠다. 입단할 실력이 되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고, 또 실력이 되어도 운이 따라야 했다. 운명을 믿든 말든. 운명이 있든 없든. 그것이 서러움의 본질이다. 재능과 운은 감히 다룰 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뜻을 둔 청년은 열심히 노력한다. 수도자마냥 정좌해 정신을 먼저 모으고 마음이 그칠 때에야 비로소 바둑알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단을 못한 청년도 적지 않다. 어느 누구는 결승국을 반(半) 집으로 패해 3등에 그친 것이 몇 번이나 됐다. 입단과 입단 못한 차이는 컸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다. 인생에서의 차이야 누구도 말 못하지만 말이다.

우연과 인연도 피할 수 없는 요소다. 홍태선(61) 8단은 용산고 2학년까지 바둑을 두다가 대학을 낙방했다. 입단은 꿈 꾸지 않았지만 할 게 없어 바둑만 두었다. 가난했는데 주위 아는 사람이 참가금 5000원을 대신 내주면서 한번 나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참가했고 첫 참가에 시드까지 남았다. 다음 해에 입단했다. 매우 드문 입단 운이다. 대체로 7전8기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앞서의 허장회는입단에 뜻을 둔 지 5년 만에 9전10기로 입단했고 임창식은 7년 만에 입단했다.

불안은 다들 겪어야 했던 문제였다. 운이든 노력이든 입단할 때쯤이면 평상심이 조금은 찾아왔다. 평상심이 오는 것도 운인 걸까. 열에 아홉, 입단자들의 토로에는 평상심이 언제나 들어 있었다.

70~80년대 바둑계는 척박했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기원에서 사범으로 일해 돈 벌며 바둑을 두었다. 하루라도 돌을 잡지 않으면 바둑은 설어졌다. 어려운 현실 속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던 청년들에게 입단대회는 최후의 관문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청춘을 썩였다. 84년 한국기원은 10대 연구생에게만 입단을 허용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입단에 실패한 청년들이 20~30대를 허무하게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70~80년대의 입단대회도 끝이 났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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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