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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세상을 말하다] 秋扇<추선>

오월로 접어들기 무섭게 봄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여름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이제 소매는 걷고 셔츠의 맨 위 단추 하나 정도는 풀어야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지며 자연히 부채를 찾게 된다. 그러나 상처받기 싫어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두에 두는 게 몸에 배이기라도 한 탓일까.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던 부채를 꺼내들면서 추선(秋扇)을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전한(前漢) 시대에 성제(成帝)의 사랑을 듬뿍 받던 후궁 반첩여(班婕妤)가 있었다. 어질고 우아하며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그러나 날씬하고 아름다운 자태(輕身細腰)에 노래와 춤에도 뛰어난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궁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황제의 총애가 식었다. 게다가 조씨 자매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혀 죽을 뻔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풀려나는 고초까지 겪었다.

이후 황제를 떠나 황태후를 모시며 사는 길을 택함으로서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때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이젠 철 지나 쓸모 없게 된 가을 부채처럼 철저하게 잊혀진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처량하기 그지 없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망을 담은 노래 원가행(怨歌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새로 끊어 낸 제(齊)나라의 흰 비단은(新制齊紈素) 희고 깨끗하기가 서리와 눈 같네(皎潔如霜雪). 이리저리 잘라서 만든 합환 부채는(裁作合歡扇) 둥글기가 밝은 달 같아라(團圓似明月). 임의 품과 소매 속을 드나들며(出入君懷袖) 흔들려 움직이면서 산들바람을 일으키는구나(動搖微風發). 언제나 두려운 것은 가을철 되어(常恐秋節至) 찬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는 것이네(凉意奪炎熱).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棄捐篋笥中) 임의 정이 중도에 끊어질까 싶구나(恩情中道絶).’

사랑을 잃은 여인을 뜻하는 가을 부채, 즉 추선(秋扇)이란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후 추선은 필요할 때는 대접을 받다가 그 쓸모가 없어지면 경시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이게 됐다. 겨울 부채 여름 화로라는 동선하로(冬扇夏爐)도 같은 뜻의 말이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 단지 그걸 깨닫고 못 깨닫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선(夏扇)을 꺼내 들며 추선(秋扇)을 생각하니 더위가 한풀 가라앉는 듯도 하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scyo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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