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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이 마오 만난 탓에 중국 예술사 몇 장 잘렸다”

중앙문혁소조 부조장 시절인 1967년 11월 4일, 홍위병들에게 둘러쌓인 장칭(맨 왼쪽). 장소는 텐안먼(天安文) 성루로 추정. [사진 김명호]
1976년 10월 6일 밤, 중공 원로들이 4인방(四人幇)을 체포했다. 명목은 격리심사였다. 거사의 주역들은 네 사람을 8341부대가 관할하는 지하실에 감금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부인 장칭(江靑·강청)도 엉뚱한 곳에서 첫 밤을 보냈다. 남편 사망 20여일 후였다.

장칭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26년 후, 감시 책임자였던 군 간부가 구술을 남겼다. “장칭은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이나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야우원위안(姚文元·요문원)과는 신분이 달랐다. 누가 뭐래도 마오 주석의 부인이었다. 4인방의 수괴라 할지라도 신경을 썼다. 양탄자가 깔린 커다란 방에 제대로 된 침상과 손잡이가 있는 안락의자를 준비했다. 입식 세면대와 좌식 변기, 커다란 욕조 등 위생시설도 완벽했다. 조사실에 갈 때도 평소 입던 의복을 착용케 하고 수갑도 채우지 않았다. 하루 세 끼는 중난하이의 간부식당에서 자동차로 공급했다.”

장칭은 사과와 잡곡밥을 좋아했다. 생활도 규칙적이었다. 태극권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76년 12월 26일 새벽의 모습은 감시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일찍 일어나 마오쩌둥 선집을 펴 들고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동안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듯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온 얼굴이 눈물 투성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날은 마오 주석의 생일이었다.”

4인방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장칭에 관한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문혁 시작 얼마 후부터 주석은 장칭을 꼴도 보기 싫어했다.” 장칭의 비서들은 한결같이 부인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다. 장칭은 중앙문혁소조의 제1 부조장이었다. 주석의 비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문혁 초기 장칭은 댜오위타이(釣漁臺)에 머물렀다. 오후에 회의가 없는 날엔 거의 매일 주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장칭이 주석의 숙소로 가는 것은 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것이지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주석이 장칭을 멀리한 것은 사망 몇 년 전부터였다.”

1 신중국 초기의 마오쩌둥과 장칭(왼쪽). 1954년 봄, 중난하이(中南海). 2 소녀 시절 장칭의 꿈은 연극배우였다. 1932년 칭다오(靑島)대학 도서관 직원 시절, 실험극단 단원들과 야유회를 나온 장칭(왼쪽 세번째).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은 없다. 살다 보면 약점이 있게 마련이다. 30년대 중반, 상하이에서 연기자 생활을 할 때 장칭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 유명세를 타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가는 곳 마다 남자문제로 사고를 쳤다.

마오쩌둥과 결혼하면서 쑥 들어갔던 전설들이 몰락과 동시에 다시 튀어나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3가지 가짜였다. “장칭의 두발은 가짜다. 가슴과 엉덩이도 마찬가지다. 가짜가 아니라면 여자를 좋아하던 주석이 멀리했을 리가 없다.” 이 정도는 점잖은 편에 속했다.

모 간부가 했다는 말을 직접 흉내 내며 옮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천지간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빗발쳐도 공포를 느낀 적이 없다. 딱 한 가지 무서운 게 있었다. 오밤중에 장칭의 호출을 받으면 정말 무서웠다.”

입소문에만 그치지 않았다. 번듯한 출판사에서 낸 책에 “문혁 시절, 한 간부가 내게 사진을 보여줬다. 손바닥만한 수영복 입은 장칭이 왼손으로 야우원위안을 끌어 안고, 오른손으로 장춘차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이었다. 정말 보기에 흉했다”는 내용이 실릴 정도였다.

세월이 흐르자 6년간 장칭의 신변을 거들던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 “장칭의 두발은 일품이었다. 새까많고 윤기가 돌았다.” 간호사를 겸했던 여비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밥 배불리 먹고 할 일 없는 것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말이다. 장칭은 용모나 몸매가 단정했던 사람이다. 그 어떤 여인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장식을 싫어했고 화장품도 사용한 적이 없다. 패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칭을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비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장칭에 대한 결례라며 한 대 후려 갈기고 싶었다. 장칭의 문화수준은 쑹메이링을 능가했다. 사람 됨됨이도 고급이었다. 본명 대로 구름(雲)위의 학(鶴)같은 여인이었다. 복잡한 시대에 태어나 마오 주석을 만나는 바람에 중국 예술사는 몇 장이 잘려나갔다고 봐도 된다. 사나웠다고 비난들을 하지만, 바보 멍충이가 아닌 다음에야 나이 들어서 그 정도 사납지 않은 여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문혁 시절 장칭에게 밉보여 감옥까지 갔다 온 비서들의 증언이다 보니 권위가 있었다.

장칭의 전화 받기가 무서웠다는 전설적인 인물도 말년에 분노를 드러냈다. “정권 잡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장칭을 모욕하고, 나를 모욕하고, 역사를 모욕하고, 마오 주석의 형상에 오물을 끼얹었다. 장칭은 주석의 부인이며 정치국원이었다. 지위와 권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에 10여명의 요원들이 늘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규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기회나 장소가 없었다.”

장칭은 총명한 여인이었다. 행운만 계속되는 사람은 없고, 고난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에 의해 들통이 날지언정, 제 손으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자신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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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