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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속여서 끌고가는 것 직접 봤는데 꾸며낸 일이라고?” … “사설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라” … JP, 와타나베 사장 호통쳤다

1999년 9월 3일 김종필(JP·왼쪽 둘째) 총리가 일본 도쿄 왕궁을 찾아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예방, 30분간 환담하고 오찬을 함께했다. 한국 총리로서는 첫 일왕 예방이다. JP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초청으로 9월 1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JP 왼쪽은 부
인 박영옥 여사, 아키히토 일왕 오른쪽은 미치코(美智子) 왕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지만 한·일 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1951년부터 65년까지 벌인 14년간의 회담에서 위안부는 단 한 번도 의제가 된 적이 없었다. 62년 11월 내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청구권 담판을 벌일 때도 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일본의 잘못을 덮어주자는 뜻도 아니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암묵적 분위기였다. 당시 위안부들은 참담한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인간 이하의 최저 나락에 빠졌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온몸과 마음에 상처뿐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아직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젊었다. 처참한 고생을 겪은 뒤 겨우 고국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들의 과거사와 상처를 꺼내는 것은 2중·3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싫건 좋건 연결돼 있다. 광복 70년인 올해, 일본 식민제국주의 치하의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와 경제·사회·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21세기 지구촌에서 일본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일본은 역사의 아픔을 준 한국·중국 등 이웃 나라들을 이해하고 서로 공존·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만 한다. 이제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몇 분 안 된다. 그분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지난해 일본 정계의 거물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생활당 대표가 한국을 찾아와 나와 같이 점심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아베 총리는 30년대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한창이던 그 시절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다. 이걸 아베가 생각해야지 독불장군처럼 밀고 나가서 무슨 집단적 자위권 운운하는데 그런 소리를 자꾸 해서 우익을 자극하면 매우 위험하다. 당신도 지나칠 정도로 우익이지만 아베 총리는 더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어디선가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나는 이어서 “위안부 문제도 우리가 정당한 해법을 다 내놨으니 아베가 반성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상을 자꾸 부정할수록 문제 해결이 더 힘들어진다. 아베 총리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자와 대표는 묵묵히 듣더니 “(일본에 돌아)가서 총리에게 얘기하겠다”고 답했다.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너무 대조된다. 메르켈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영원히 반성하고 사죄한다. 위안부 문제는 홀로코스트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일본은 반드시 이 과거를 기억하고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JP의 증언을 토대로 스케치한 일제시대 군 위안부 모집 담당 군속(軍屬). 옛 교복처럼 깃이 달린 상의와 각반, 일본 고유 작업화인 지카다비가 특징이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니까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2001년은 연초부터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격화됐다. 일본에서 한일병합(倂合)을 정당화하고 위안부 내용을 삭제하는 등 왜곡된 과거사를 담은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정식 교과서로 채택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우리 여야 의원들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시민단체는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시위와 집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언론은 줄곧 무성의한 태도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3월 2일자 사설에서 ‘일본은 사상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나라다’는 제목 아래 ‘정신대(挺身隊)는 전쟁 시 근로를 위해 동원된 것’이라며 중국과 한국이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위안부가 강제 동원됐다는 사실(史實)을 ‘뎃치아게루(でっち上げる·꾸며낸 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마침 일본에 체류 중이던 3월 7일 한·일의원연맹 회장 자격으로 류흥수(연맹 간사장·한나라당)·장재식(부회장·자민련)·이윤수(운영위원장·새천년민주당) 의원과 함께 요미우리신문사 본사로 쳐들어갔다.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2005년부터 회장) 사장 겸 주필에게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어이, 쓰네오상. 이럴 수가 있어? 당신 나이가 나하고 같으니까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글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 글 누가 썼어? 이거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 와라.”

 와타나베는 나와 동갑내기로 오랜 일본 친구다. 1961년 내가 35세 때 이케다 총리를 만나기 위해 한·일 회담 밀사로 일본을 찾았을 때 그는 정치부 기자로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실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일본 문예춘추 9월호에 쓴 기고에서 나를 “한국 경제의 폭발적 성장을 실현시킨 공로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2001년 JP가 항의 방문한 요미우리신문사의 와타나베 쓰네오 사장 겸 주필. [중앙포토]
 잠시 뒤 글을 쓴 당사자를 포함해 편집국장과 논설위원들이 모였다. 그들이 오자마자 나는 일본어로 막 야단쳤다. “당신들, 지나사변(중일전쟁·1937~45년)이 일어났을 때 몇 살이냐. 그 당시에 일본 군대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복장을 아느냐. 헌팅 모자 쓰고 쓰메에리(깃이 목을 둘러 바싹 여미게 지은 양복) 하얀 것 입고, 그 위에 윗도리 걸치고, 아래는 단코바지(아래는 좁고 허벅지 부분은 넓은 승마복 같은 바지) 입고, 게토루(각반) 찬 놈도 있고, 지카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 신) 신고, 뒷주머니에 허연 수건 꽂고…. 이런 놈들이 돌아다니면서 ‘전부 군대 나가는 바람에 생산수단이 없어 사람들이 모자란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산기관에 가서 일하면 돈 벌고 그 돈을 어머니·아버지에게 보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이렇게 속였다. 이 장면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을 일부는 생산기관에 배치했겠지만 대부분은 즉각 강제로 중국으로 보내가지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꾸며낸 일(뎃치아게루)이라고?”

 이건 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는 나의 중·고교 시절, 고향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나의 호통에 와타나베 회장은 물론 논설위원 중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그들은 위안부를 ‘가난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일본 언론사들을 한 바퀴 돌았다. 이튿날은 아사히신문을 찾아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 상태를 자세히 알렸고, 그 다음 날은 산케이를 찾아 보도 태도에 항의했다.

 그간 일본의 전중(戰中)세대,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해 왔다. 일본 아사히 신문 종군기자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 쓴 『제국육군의 최후』(1960·문예춘추사)라는 책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이 책에 따르면 손재주가 좀 있어 보이는 여자는 공장으로 데려갔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중국 대륙으로 끌고 가 군대 위안부로 만들었다. 일본 군대가 만주로 가면 위안부도 만주로, 월남으로 가면 월남으로 데려갔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각 섬으로 흩어졌다. 용산에 진주하던 일본군 20사단은 수송선을 타고 뉴기니로 향했는데, 미국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배 절반이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그때 배에 함께 탔던 종군위안부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토의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아마도 누군가가 위안부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위안부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던 우리 사회 분위기는 70년대도 비슷했다. 내가 국무총리를 하던 시절이다. 1971년 5월~72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기존 한·일 협정의 청구권과 별도로 일제시대 민간인 피해자 보상을 위해 ‘대일(對日) 민간 청구권 신고’ 창구를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총 14만여 건, 액수로는 약 40억원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가 신고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신고의 70%는 은행 예금이었고 그 외에 국채·생명보험·우편저금·회사채·전쟁사망자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분들이 자신을 드러내 일본 군국주의의 폐해를 고발하고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를 호소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희생과 헌신이 아닐 수 없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오자와 이치로(73)=일본의 보수개혁 정치인. 현재 13선 중의원 의원이며 생활당 공동대표. 자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 민주당 대표 등을 지냈다. 자유민주당을 탈당해 신생당 실권자였던 1993년, 일본신당 등 7개 소수연립여당을 성립시켜 비자민당 출신 최초로 호소카와 모리히토 총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55년 체제’로 불리던 자민당 독주체제가 38년 만에 무너지고 일본 정계에 혁신의 바람이 일어났다. 이때 그가 쓴 저서가 『일본개조계획』으로 정치개혁과 국제사회에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국가론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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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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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