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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힐링 북

[슈어] 오랜만에 색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꼭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다. 어른과 아이에게 주어진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컬러링 북. 그 세계에 들어서면, 컬러링을 넘어 전 세계 출간된 그림책들이 보고 싶어진다.


어른들을 위한 힐링 북 PICTURE BOOKS

조해너 베스포드의 신작 <신비의 숲>의 삽화. 퍼블리싱 컴퍼니 클


얼마 전 지인을 통해 사랑하는 이에게 청혼하면서 가스 윌리엄스(Garth Williams)의 <토끼의 결혼식> 그림책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섬세한 붓 터치의 부드럽고 온화한 삽화가 돋보이는 이 그림책을 처음 접한 건 오래전이지만 ‘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청년 토끼의 그렁그렁한 눈이 인상 깊게 남는다.

<토끼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작품 어디에도 ‘사랑해’라든지 ‘결혼해 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잔잔히 흐르는 그림과 글을 통해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가 느껴질 뿐이다.

그림책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광고 노래 한 구절인 ‘말하지 않아도 알아’처럼 말이다. 그림책은 ‘읽는다’기보다는 ‘본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그림과 문자가 어우러져 종이에 물감이 스미듯 서서히 마음을 적시고 활자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느낌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 놓는다. 그림책의 인기가 뜨겁다.

<드림 프렌즈>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변유정 작가의 책이다. 서평지에서도 많은 인기를 모았다. 진정한 친구를 찾고 싶은 아이의 꿈이 뭉근한 채색으로 따뜻하게 표현되었다. 해외 출간작


이미 미국, 영국 등 오랜 그림책 역사를 자랑하는 서구에서는 그림책이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충성스러운 독자들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들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인기 그림책 작가들의 원화는 Etsy.com 등의 구매 사이트를 통해 활발하게 거래된다.

그림책 열풍은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조해너 배스포드(Johanna Basford)의 <비밀의 화원>을 시작으로 아이들의 색칠 공부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컬러링 북의 인기가 뜨겁다. 해당 출판사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인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스와 활자로 가득 찬 현대 생활에서 그림책을 통해 심미적 위로를 얻고 마음을 치유하고 싶은 어른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했다. 뭐든지 과잉된 생각이 필요한 일상에서 컬러링에 몰두하며 자신을 비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작은 유치하지만, 과정은 무념무상의 시간이며, 결과는 뜻하지 않은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는다. 해외에서도 어른들의 컬러링 작업은 이미 잘 알려진 힐링 타임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 등으로 나르는 컬러링 결과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너는 어디로 가니> 캐나다 출신 이자벨 아르스노가 그리고, 맥신 트로티어가 글을 썼다. 섬세한 선과 서정적인 색감으로 인기가 높다. 멕시코의 집을 떠나 캐나다로 이동하는 안나네 가족을 중심으로 이주 노동자 가족의 아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이 따뜻하고 색감이 맑다. 출판사 산하


이유야 어쨌든 오래전부터 지하철에 서 스마트폰 대신 그림책을 보는 어른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꾸며 ‘그림책 소믈리에’로 자처하고 나선 나로서는 이 모든 변화가 달콤하기만 하다.

그림책은 엄마 품만큼 좋다. 세상에 엄마 품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접하는 예술 작품이 그림책이다. 뛰어난 미술 작품과 정제된 언어 문학이 어우러진 그림책이 인간을 자라게 한다. 그림책만큼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것이 또 있을까?

요즘 그림책은 요즘 책대로 신선하고 예전 그림책들은 있는 그대로 진중한 맛이 있다. 어차피 인간 내면의 기본 바탕은 다 같은 법이니까. 어린 시절 봤던 그림책을 다시 읽는다면 ‘왜 이리 구닥다리고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까? 그렇지 않다.

그 시절 어린 나로 돌아가 작품을 다시 만나 그 시절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건 제대로 된 정화 작용이 일어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인이 되어 다시 보게 된 그림책에서 예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감동과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많다.

그림책은 몸에 딱 맞는 양복처럼 구색이 매우 다양하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그림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우중중한 날씨와 우울한 기분을 확 날려버릴 강렬한 색채의 향연에 빠지고 싶다면 영국 3대 그림책 작가 중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Brian Wildsmith)의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빨간 나무> 어린이가 보기엔 다소 우울한 그림책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작가 숀 탠은 이 책을 통해 어린이의 어둡고 우울한 감성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의 음울한 세계는 어른과 다르지 않다. 공상과학에 삽화를 그리는 등 그의 작업 세계를 잘 담은 책이다. 출판사 풀빛


무기력감에 빠져 의기소침한 사람에게는 전 세계 수많은 성인 독자들을 울다 웃게 만드는 작가 피터 레이놀스(Peter H. Reynolds)의 <점>을 추천한다. 숨 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도 그림책으로 대신 할 수 있다.

셀리아 쇼프레(Celia Chauffrey), 다비드 살라(David Sala) 등 프랑스 작가의 그림책은 대담하고 화려해 유럽의 정취에 푹 빠져들게 한다. 그림책 분야에서 이란 작가들의 활약상이 유난히 눈에 띈다.

호더 하더디(Hoda Haddadi), 시린 에이들(Shirin Adl) 작가의 작품들은 화려한 페르시안 모스크 돔 천장을 살펴보는 듯하다.

동유럽 작가의 그림책에는 그곳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오고, 이탈리아 작가에게는 남유럽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화려함이 드러나 그림책으로 세계여행을 한다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무척이나 아름다워 가지고 싶은 그림책이든 나에게 이제껏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준 그림책이든 그림책은 수많은 대화 거리를 제공한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자녀를 두고 있는 필자는 한때 화제를 모은 밥상머리 교육에 대한 TV 프로그램과 책을 보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친구> 호더 하더디는 테헤란에서 태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라가치 상 수상작들을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다. 꽃잎과 나뭇잎 등 자연 소재를 모티브로 이야기 그림을 펼친다. <친구>는 두 친구의 숲속 여행기다. 출판사 큰나


이제 막 학생이 된 자녀니 주된 대화 소재가 결국 학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대화를 하겠다고 시작한 밥상머리 교육은 매번 꼬치꼬치 캐묻기 과정을 거쳐 훈계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게 그림책 한 장면을 보여주는 걸로 대화의 소재를 찾아보자였다. 가장 처음에 집어든 책은 국내 김동성 작가의 그림책 <고향의 봄>이다.

전 국민이 다 아는 가사 말처럼 울긋불긋 꽃 대궐 동양화가 30여 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이 걸작을 아이의 일상이 꽃처럼 화창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담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면 그림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참신한 외국 문학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필자는 아이를 둔 어머니들로부터 학업에 도움이 되는 그림책이라든가 영어 레벨 향상에 도움이 되는 그림책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일단 그림책을 만날 때 ‘계급장을 떼고 만나라’라는 말을 누구에게나 하고 싶다. 이 그림책은 특정 나이대의 독자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든지 꼭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라든가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부담감 없이 말이다.

<고향의 봄> 한국적인 서정미를 펼치며 그림책 작업을 하는 김동성 작가의 작품. 서양화 기법을 접목시켰으나 기본적으로 수묵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있다. 기억 속의 봄을 선물해준다. 출판사 파랑새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는 데 그림책의 특별함이 있다. 활자와 정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잠시 머릿속을 비운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비우면 무엇으로 채워질까?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그림책을 보면 삶이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싶다. 별로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 21세기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각 근육을 훈련시키고 감각 촉수를 예민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똑같은 경험에서도 더 많이 느끼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승자라는 이야기다. 더더욱 무뎌진 감각 촉수를 예민하게 하기에 ‘내 손안의 예술품’ 그림책을 적극 활용하기를 권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림책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림책에는 이루어지게 하는 힘도 있다. 뭔가 끄적이고 싶고 낙서라도 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짧은 카드라도 하나 쓰고 싶은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 소피 블랙올(Sophie Blackall)의 스토리는 그러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다. 그림 작업의 처음은 호주 바닷가 모래사장에 낙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그림 솜씨가 그리 신통치 않았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 2006년에 정유미 애니메이션 감독이 삽화를 중심으로 영화화한 적이 있다. 2015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소녀가 직접 만든 인형 상자 안을 여행하면서 4명의 캐릭터를 만나게 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출판사 컬처 플랫폼


하지만 그림책 사랑이 간절했던 소피는 종이에 조금씩 끄적인 그림을 방 천장과 벽에 붙여놓고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바라보다 잠들곤 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활동 무대를 호주에서 뉴욕으로 옮긴 소피 블랙올은 지금 그녀의 작품으로 뉴욕 지하철 벽을 장식하는 저명한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호주 시골의 의기소침한 소녀를 뉴욕의 예술가로 키웠듯이 그림책의 힘을 믿어보자. 그림책은 어린이에게는 성장의 자양분이고 어른들에게는 힐링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림책으로 청혼한 사나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토끼의 결혼식>이라는 그림책의 제목처럼 토끼같이 귀여운 자녀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다고 전해주고 싶다.


기획 슈어 한지희, 사진 김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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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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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