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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 인류의 역사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해선 안돼

아르메니아인 학살 100주기를 맞아 세계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AP=뉴시스]


지난달 24일은 오스만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학살 1세기를 맞아 이를 조직적인 인종청소인 ‘제노사이드(genocide)’로 볼 것인가를 놓고 오스만제국의 승계국 터키와 국제사회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문제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와 함께 오랫동안 유럽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19세기 말부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 1923년까지 오스만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학살·강제추방·기아·고문·납치 등의 방식으로 조직적인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주장이 문제의 핵심이다.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국제사회를 통해 제노사이드 인정과 함께 공식 사과와 재산 반환 및 보상 등을 요구하며 터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왼쪽에서 첫째)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왼쪽에서 둘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에서 첫째)이 지난달 24일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있는 학살희생자 추모탑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터키 정부는 그동안 터키인과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간 유혈 충돌과 대규모 희생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르메니아인의 희생은 제1차대전 발발 직후 오스만제국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적국인 러시아에 동조하고 제국을 등진 반란행위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충돌과정에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 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막고 고립시키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단호한 외교적 대응을 해왔다.

프랑스에선 아르메니아 학살 부정 땐 처벌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시 크게 불거진 것은 2012년 1월 프랑스 의회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후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랜 투쟁의 승리를 자축했지만, 터키와 프랑스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이 법의 발효로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고, 튀니지ㆍ모로코ㆍ알제리 등을 식민통치하면서 수백 년간 아랍인 박해와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역사적 과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00주기인 올해의 상황은 터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급기야 유럽의회가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통과시켰다. 지난달 12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현재까지 23개 국가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사회는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맹국이자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터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관련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아르메니아 테러로 터키 외교관 46명 희생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의 터키에 대한 투쟁은 격렬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전화를 받았다. 당시 그들에게 유럽은 위험한 근무지였다. 아르메니아 극우단체인 '아살라(ASALA)'의 표적 테러로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46명에 달했다.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터키는 학살주범으로 응징대상이었다. 또 터키의 공식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민족적 소명이었다. 그러나 테러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아픈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국제적 지지를 받지 못하자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아르메니아인 학살문제에는 생각보다 훨씬 복합적인 요소들이 혼재돼 있다. 과거 오스만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밀레트(Millet)’라는 소수민족 공동체에서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하면서 거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누렸다. 1876년 9월 주이스탄불 영국대사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오스만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1877~7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지원했다.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 독립국가 건설을 꾀하는 민족주의 단체가 등장했고, 훈체크ㆍ다시나크파 같은 정당들도 결성됐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ㆍ비트리스ㆍ반ㆍ엘라지으ㆍ디야르바크르ㆍ시바스 등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고 오스만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겨냥한 테러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됐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다.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불신은 크게 확산됐다.

아르메니아 “오스만제국 정부가 학살 지시”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11월 1일 독일ㆍ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참전했지만 패전으로 인해 붕괴됐다. 당초 오스만제국은 중립을 원했지만 러시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동부 지역을 침략하자 결국 동맹국에 합류하게 됐다.

이때 오스만제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공격하자, 제국은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고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날을 대학살 추모일로 정했다.

곧이어 5월 30일엔 당시 오스만제국의 내무장관 탈라트 파샤는 내부의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강제이주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강제이주에 따른 굶주림·질병·혹한 등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조직적인 학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파샤의 강제이주 명령서를 학살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터키 측은 오스만제국의 공문서 양식과 다른 조작된 서류라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학살자 수 싸고 논란 150만명 vs 30만명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성격을 둘러싼 논란은 첨예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보여준다.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 학살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터키는 70만 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고집하고 있다.

서구의 자료들에 따르면 희생자는 60만~150만 명이다. 학살자 숫자는 조직적 학살이었느냐는 논란만큼 그 차이가 크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인구는 오스만제국의 통계에선 129만 5000명이었다.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150만 명으로 집계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살자 숫자 확인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인은 물론 이주와 도망, 질병 등으로 숨진 오스만제국 시민들의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 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일일이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 그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다뤄졌다는 점이다. 오스만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들고 나와 터키 정부를 괴롭혔고, 터키의 극우정당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아르메니아인 학살 자체를 부정해왔다.

‘전쟁 중 불가피한 사건’여부가 핵심 논란

유독 프랑스가 이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자국 내 5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 유권자들 때문이었다. 터키의 EU가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민감한 아르메니아 문제를 통해 터키를 견제하겠다는 정치적 속셈을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핵심은 ‘전쟁 중 일어났던 우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비극이었나, 아니면 계획된 조직적인 인종청소였나’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강제동원이 없었다며 인신매매 조직에 의한 범죄나 자발적 매춘행위로 매도하는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정부의 입장을 투영해본다면 아르메니아 문제도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ㆍ일 관계와 다른 점은 지금도 터키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이 터키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을 형성하고 터키 시민으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이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제멋대로 해석되고 악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 양측의 민족적 앙금과 역사적 적개심을 치유하고, 미래 지향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희수 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한국중동학회 회장. 한국ㆍ터키 친선협회 사무총장. 터키 이스탄불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터키 마르마라대학 교수 등 역임. 주요 저서는 『이슬람 문화』 『쿠쉬나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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