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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4] 염증 느낀 린뱌오, 마오쩌둥 추악한 모습만 눈에 들어와…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마지막 만남. 1971년 5월 1일 밤. 텐안먼 성루, 4개월 후 린뱌오는 몽고 사막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사진 김명호]

린뱌오(林彪·임표)가 마귀 소리 들은 지 40여년이 흘렀다. “중국 인민의 가장 우수한 아들”에서 하루 아침에 “인류의 쓰레기”로 전락한 것을 보면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케 한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린뱌오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마오쩌둥 시대의 무덤을 판 장본인이다. 중국 현대사는 1971년 9월 13일, 린뱌오의 사망으로 줄기를 틀었다. 문혁 시절 마오쩌둥은 자신이 마르크스와 진시황을 합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마르크스보다는 스탈린이 더 적합하다고 하지만 실제는 더 지독했다. 진시황과 스탈린, 히틀러를 합쳐도 마오쩌둥만은 못했다. 린뱌오는 지혜와 모략의 결정체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마오쩌둥과 대결하며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선택을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마오쩌둥도 만회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인생의 종점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린뱌오의 죽음은 문혁을 겨눈 첫 번째 총성이었다. 덩샤오핑(鄧少平·등소평) 집권 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한 사람이 린뱌오의 명예회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역사는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역사 왜곡은 국민과 당에 불리하다. 린뱌오는 반역을 도모한 적이 없다.” 덩샤오핑은 얼버무렸다. “그건 마오쩌둥과 린뱌오에게 요구했어야 할 문제다. 내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린뱌오의 붓 역활을 자청했던 천보다(오른쪽)의 사망 일주일 전 모습. 왼쪽은 천보다의 평전을 집필한 예용례(葉永烈). 1989년 9월 13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1928년 4월 28일, 징강산(井岡山)에서 처음 만났다. 마오는 린뱌오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애지중지했다. 무슨 주장이라도 하면 “어린애가 뭘 아느냐”며 면박도 잘 줬다. 린뱌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 “저것 보라”며 재미있어 했다. 툴툴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귀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당시 린뱌오는 주더(朱德·주덕)의 부하였다.

1965년 5월, 고희를 넘긴 마오가 징강산을 찾았다. 8일 간 일반 객실에 머무르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린뱌오에게 자작시 한 수를 보냈다. “오랜 세월, 꿈길에서 구름을 넘나들다 다시 징강산에 올랐다. 천리 밖에서 옛 땅 찾아오니, 옛 모습이 새 얼굴로 변했다….”

4년 후 '마오쩌둥의 친밀한 전우이자 계승자'가 된 린뱌오도 군 사령관들을 데리고 징강산에 올랐다. 마오가 묵었던 방에 짐을 풀고, 밤만 되면 산책을 나갔다. 폭동에 실패하고 산에 오른 주더와 마오쩌둥이 처음 만났던 나무 밑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행원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 나무는 백년이 넘었다. 우리는 이 그늘에서 숨을 돌리며 잡담을 나눴다. 주석은 나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정권 쟁탈은 운동경기와 같다. 승자는 한 명이다. 정권을 탈취하려면 총과 붓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글쟁이가 없다. 총과 붓은 인간의 두 팔과 다를게 없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몰락 후 개국공신과 무인들의 액운은 그칠 날이 없었다. 린뱌오는 전쟁 시절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이론가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직접 마땅한 사람을 물색했다.

두 자녀와 함께한 린뱌오와 예췬. 1960년대 중반 [사진 김명호]
문혁 초기 천보다(陳伯達·진백달)는 당 서열 5위였다. 마오쩌둥의 정치비서를 역임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지만 투기성이 농후했다. 마오의 신임을 잃자 린뱌오에게 접근했다. 린뱌오 부부는 제 발로 찾아온 붉은 수재를 상객(上客)으로 모셨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국가주석 문제로 마오와 충돌한 린뱌오는 불평을 가누지 못했다. 마오의 성격과 품성까지 물고 늘어졌다. 잘못을 인정하는 권고를 받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예췬(葉群·엽군) 앞에서 가혹할 정도로 마오를 비난했다. “주석과 스탈린의 저작물은 읽을 가치가 없다. 문혁은 미친 짓이다. 대약진 운동도 정신 나간 사람이 벌인 일이다. 주석은 국민의 생계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명예와 지위, 권력과 이익에만 치중한다.”

속으로는 그랬지만 겉으로는 3불(三不)정책을 고수했다. “마오의 결심에 관여하지 않는다. 비판하지 않는다. 나쁜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 지방을 순회하며 군 간부들에게 린뱌오를 비난했다. “뤼산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나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여전히 당 내에 잠복해 있다.” 린뱌오는 마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휴양지에서 보고받았다.

염증을 느끼자 마오쩌둥의 추악한 면만 눈에 들어왔다. 린뱌오는 마오와 결별을 결심했다. 1971년 5월 1일 저녁, 텐안문 광장에서 노동절 기념 불꽃놀이가 열렸다. 시아누크와 함께 나타난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던 린뱌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텅 빈 마오의 앞자리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연신 시계를 보며 어딘가 전화를 거느라 분주했다. 린뱌오가 휘청거리며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린뱌오는 마오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았다. 민망한 마오는 시아누크에게 계속 말을 걸며 딴청을 부렸다. 린뱌오는 5분도 못돼 자리를 떴다. 마오와 악수도 나누지 않고, 참석자 누구와도 아는 체를 안 했다. 징강산에서 마오를 처음 만난 지 43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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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