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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경주에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연 유충희 관장

유충희 한국대중음악박물관장이 진열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중현·윤복희 등 내로라하는 스타부터 인디밴드까지 많은 뮤지션이 악기와 의상을 기증해주었다. 박물관이 더 풍성해졌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나. 시대는 노래를 억눌렀어도 사람들은 이를 용케도 피해나갔다. 이미자(74)의 대표 곡 ‘동백아가씨’가 그렇다. 1964년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주제가로 발표된 ‘동백아가씨’는 돌풍을 일으켰다. 35주 연속 인기 1위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듬해 당국이 방송금지곡으로 묶었다. 노래가 일본풍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일 국교수립 정상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의식한 조치였다.

 그러자 66년 ‘동백아가씨’ 일본어 해적판이 등장했다. 이사벨이라는 정체불명의 외국 여성 사진이 담긴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라는 앨범에 ‘동백아가씨’ 일본어 음반을 몰래 함께 집어넣었다.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는 촌스러운 가사집도 앨범 뒤에 붙여놓았다. 원곡은 87년 해금됐는데, 해적판은 ‘동백아가씨’ 앨범 가운데 가장 귀한 것으로 남게 됐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K POP MUSEUM) 2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50년이 흐른 지금, 시대의 아이러니가 그대로 전해진다. 지난달 25일 경주 보문관광단지에 들어선 이곳은 20세기 한국인을 웃고 울렸던 가요를 한데 모은 국내 첫 대중음악박물관이다. 대지 6600㎡. 반듯한 3층 건물에 소장품만 7만여 점에 이른다. K팝 붐을 타고 그간 정부에서도 몇 차례 가요박물관 건립을 계획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결실은 없었다.

 지난달 27일 박물관을 찾아갔다. 건물 전면에 걸린 ‘가장 소중한 우리의 추억을 찾아서’ 문구가 눈에 띈다. 70년대 초 히트한 ‘얼굴’의 가수 윤연선이 기타 치는 모습도 2~3층 창가에 크게 붙어 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처럼 지난 100년 우리의 잘나고 못난 ‘얼굴’을 그러모은 유충희(56) 관장을 만났다.

지난해 노래 인생 55년을 맞은 이미자와 ‘동백아가씨’는 동의어와 같다. 1964년 발매된 오리지널 앨범에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의 얼굴이 보인다. 오른쪽은 66년 불법 유통된 ‘동백아가씨’ 해적판의 앞뒷면.



 - 정부가 못한 일을 했다는 평가다.

 “크게 자랑할 일이 아니다. 노래가 좋아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한 게 어느덧 30년이 됐다. 4년 전 ‘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작은 갤러리나 음악감상실을 구상했다. 전시된 것은 소장품의 극히 일부다. 예컨대 음반이 1000여 종 나왔는데, 5만 장 가운데 추리고 추린 것이다. 특이하고 기념될 만한 것을 골랐다.”

 - 왜 하필 경주인가. 서울이 나을 텐데.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관계로 경주를 자주 들르는 편이다. 지인의 권유로 이곳을 택했다. 보문단지가 요즘 정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손꼽히는 관광지다. 박물관 바로 옆에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화백컨벤션센터가 있어 외국인이 찾기에도 편하다. 서울은 땅값이 비싸 엄두도 내지 못했다.”

 -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순천공고를 나와 부산에서 전기기사로 취직했다. 전신주·변압기 등을 보수·관리하는 일을 했다. 일은 힘들었어도 음악으로 피로를 달랬다. 당시 13만~14만원 남짓 월급을 받았는데 주로 음반이나 테이프를 구입했다. 포크음악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장욱조의 ‘고목나무’, 이현의 ‘잘 있어요’, 양희은의 ‘아침이슬’,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 등을 자주 들었다. 특히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로 시작하는 ‘고목나무’가 큰 힘이 됐다.”

 - 말이 7만 점이다. 만만치 않은 양이다.

 “음반·악보·책·오디오 등을 합한 수치다. 80년대 초 이란·인도에 가서 돈을 조금 모았다. 92년에는 내 회사도 차렸다. 공항·발전소·고속철도 등의 전기 설계·감리업이다.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기술사 자격증을 땄고, 박사 학위도 받았다. 돈이 생기는 대로 음반을 수집했다. 일주일에 두 장도, 세 장도 좋았다. 70년대 음악에서 시작해서 40~50년대, 일제 강점기 유성기 음반까지 폭을 넓혀 갔다. 수입의 절반쯤은 쏟은 것 같다.”

 - ‘미친 짓’ 소리도 들었겠다.

 “아내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인정하게 됐다. 사업도 중요하지만 남는 건 음악뿐이다.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 생겨도 노래를 듣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좋은 생각도 떠올랐다. 희열을 느꼈다. 차츰 재미가 붙으면서 희귀, 최초, 데뷔 음반 등 기록적 가치가 있는 앨범을 찾게 됐다.”

 - 예를 든다면 어떤 게 있나.

 “윤심덕(1897~1926)부터 싸이(38)까지 지난 100년 쟁쟁한 스타들의 데뷔 앨범은 거의 다 모았다. 시대 순으로 전시했기에 한국가요사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절로 공부가 된다. 최초가 들어가는 앨범도 숱하다. 1896년 미국 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가 녹음한 한민족 최초의 에디슨 원통형 음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 선수의 인터뷰 육성 음반, 최초의 직업 가수로 꼽히는 채규엽(1906~49)의 음반, 해방 이후 처음 나온 남인수(1918~62)의 ‘가거라 38선’, 최초의 댄스 가수인 이금희(1940~2007)의 ‘키다리 미스터 김’ 등등 나열하기가 어렵다.”

 - 박사 논문을 쓸 거리가 널려 있다.

 “올해는 광복 70년을 맞는 해다. 한국가요사는 정리할 대목이 많다. 지금부터라도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최초의 가요를 두고도 아직 정설이 없다. 흔히 최초의 대중가요로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년)를 꼽지만 그 한 해 전에 안기영의 ‘내 고향을 이별하고’와 박채선·이류색의 ‘이 풍진 세월’(일명 희망가)이 있었다. 학자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박물관에 오면 다 볼 수 있다. 우리 가요에 애정을 가져 달라.”

 - 대중음악사 공부도 많이 했나.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모두 음반을 모으며 쌓은 지식이다. 박물관을 열면서 가요평론가·방송사 PD·교수 등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모두 15명의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제가 자의적으로 뽑은 음반은 하나도 없다.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

 -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음반이 있다면.

 “63~64년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신중현(77)의 데뷔 앨범이다. 당시 히키신이란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신씨의 신들린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워낙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다. 서수남(72)·하청일(73) 등으로 구성된 아리랑브라더스가 64년 녹음한 ‘우리 애인은 미스 얌체’는 국내 최초의 통기타 앨범이다. 나중에 ‘동물농장’이란 타이틀로 재발매됐다. 그리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 지금은 꽤 비싸겠다. 예상하고 모았나.

 “수익을 고려했다면 부동산에 투자했을 것이다(웃음). 예전에는 음반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부동산처럼 목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투자 효율을 생각한다면 박물관을 세우겠는가. 6개월 내에 운영비를 댈 정도만 된다면 원이 없겠다.”

 - 3층 오디오관의 규모와 수준이 놀랍다.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의 시스템을 다수 구비해놓았다. 당시 일반극장에서 쓰인 것들이다. 요즘과 비교해 디자인이 우악스럽지만 소리는 매력적이다.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듣는 음악을 느낄 수 있다. 사람처럼 오디오도 시간이 더할수록 더 성숙해지는 것 같다. 애인 같은, 자식 같은 존재다.”

 - 박물관은 설립보다 운영이 중요한데.

 “가요는 우리 영혼의 밥과 같다. 값싼 음악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들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인이 지난 100년의 풍진(風塵)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왔겠는가. 장르별·주제별 기획전도 준비 중이다. 세대 간 대화를 위해 아이돌 가수의 사인 CD 500여 장도 1~3층 계단에 진열해놓았다. 1500㎡ 규모의 야외공연장도 있다. 연구와 공연, 전시가 함께하는 박물관으로 키워가겠다. 다행히 방송사들의 공연 섭외도 들어오고 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조용필 데뷔 앨범 독집 아니었다 … 뒷면에 ‘조영필’로 잘못 표기도

‘가왕’ 조용필(65)의 첫 독집 앨범은 1972년에 나온 ‘돌아와요 부산항에’(사진 위)다. 발표 당시 주목받지 못했지만 요즘에는 100만원을 호가할 정도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4년 뒤 리메이크되면서 빅히트를 쳤다. 트로트 버전이었던 72년 노래에 록을 가미한 ‘뽕필’ 가득한 노래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조용필의 데뷔 앨범은 71년 ‘뮤지칼 사랑의 일기’(사진 아래)다. 조용필은 그해 5월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록밴드 김트리오 멤버로 참가해 가수왕에 올랐고, 음반 제작 기회를 얻었다. 신인 가수이기에 독집 앨범은 아니었다. 음반 뒷면에 ‘조영필’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다. 지금은 200만원 넘게 거래되는 ‘귀한 몸’이다.

 특급 가수도 신인 시절에는 독집을 내기 어려웠다. 가수의 데뷔 연도를 따지기가 어려운 요인 중 하나다. 나훈아(68)가 그렇다. 데뷔곡은 66년 ‘천리길’로 알려졌지만 현재 확인된 앨범은 69년에 제작된 것이다. 그 1년 전인 68년에 나온 ‘파도 넘어 천리길’이 있는데 독집이 아닌 정진성 작곡집의 한 곡으로 실렸다. 저음이 매력적인 배호(1942~71)의 63년 데뷔곡 ‘두메산골’도 김광빈 작곡집에 수록됐다.

 남진(69)의 경우는 다르다. 65년 독집 데뷔 앨범 ‘서울푸레이보이’를 냈다. 그만큼 처음부터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반면 그가 집안의 반대로 바로 활동을 접어 실물을 보기 힘든 음반이 됐다. 남진 자신도 한동안 데뷔곡을 ‘가슴 아프게’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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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