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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은 전쟁터, 백의의 천사가 백의의 전사로 변했다

지난 1일 경기도 안양의 한림대 성심병원. 전체 간호사 600여 명 중 남자는 16명뿐이다. 나는 17번째 간호사가 되기 위해 이날 오전 10시 별관 10층의 간호부장실을 찾았다. 간호부에서 준비해준 백색 간호사복을 입었다. 옷을 입는 순간 어색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을 나서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돼 걸음이 빨라진다. 체험이었지만 이곳은 병원이다. 생(生)과 사(死)가 힘겹게 교차하는 운명의 공간. 엄숙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되뇌었다.

인턴기자가 체험한 남자 간호사의 세계

오전 11시, 첫 체험 장소인 혈관조영술실에 도착했다. 혈관 속에 조영 물질을 넣어 X선을 촬영해 혈관의 상태와 모양을 살펴보는 곳이다. 막힌 혈관을 빨대처럼 생긴 스텐트를 집어넣어 넓히는 시술도 한다. 고난도 시술인 만큼 직접 들어갈 순 없었다.

“환자를 눕히고 잡는 것 같이 힘쓰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남자 간호사가 더 유리하죠.”

응급실 근무 중인 김춘탁 간호사(왼쪽)와 인턴기자.
시술을 마치고 나온 곽은선(37·영상의학과) 간호사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늦깎이 남자 간호사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휴학 중에 병원 아르바이트를 한 게 인생을 바꿨다. 27세에 수능을 다시 치르고 간호대학에 진학해 간호사복을 입었다. 그는 “아픈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직업이란 점에 매료돼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

점심시간. 수많은 여자 간호사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호사들은 점심시간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응급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2명 혹은 3명씩 모여 점심을 먹었다. 한 여자 간호사는 “처음에는 남자와 일하는 게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며 “환자 부축 등 힘쓰는 일을 듬직하게 하고 환자를 성심성의껏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료로서 격의 없이 지내게 됐다”고 말했다.

오후 2시. 응급실 근무 교대를 기다리고 있는 1년차 김춘탁(27) 간호사를 만났다. 응급실의 번잡한 분위기 속 각종 장비의 반복되는 작동음이 들린다. 선임 간호사는 응급실 환자들의 상태를 소상히 일러준다. 넘어져 피부가 찢겨진 외상 환자부터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환자까지…. 근무에 투입된 김 간호사의 눈빛이 사뭇 비장하다. 그는 말 시킬 틈도 없이 응급실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어색함 없는 여자 환자와 남자 간호사
남자 간호사들이 여자 환자를 돌보는 건 낯선 장면이다. 오후 3시50분 6층 내분비외과 병동에서 그런 장면과 마주했다. 이 병동 환자 63명 중 2명을 제외하곤 모두 여자 환자다. 박형준(29·유방 내분비외과) 간호사와 함께 주치의 지시에 따라 지난주에 수술한 환자의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 처치실로 갔다. 커튼이 쳐진 공간에 20대 후반 남자 간호사와 60대 중반 여자 환자 단둘뿐이었다.

이 환자는 유방암으로 오른쪽 유방의 절반을 제거했다. 그런 그가 아들뻘인 간호사에게 스스럼없이 윗옷을 올려 수술 부위를 내보였다. 장갑을 착용한 간호사가 능숙한 동작으로 핀셋으로 소독솜을 집어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수술 부위에 소독약을 문지른다. 이윽고 핀셋을 내려놓고 일회용 칼을 손가락 끝으로 집은 뒤 위 매듭을 하나하나 끊어 가며 능숙하게 봉합된 실을 제거했다. 수술 부위 이곳저곳을 만지던 박 간호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어머니 잠깐만요. 가슴에 물이 찬 것 같아요.”

박 간호사는 주치의에게 바로 알렸고 주치의는 주사 바늘을 가져와 환자의 가슴 한쪽에 능숙하게 꽂았다. 주사기를 통해 환자 수술 부위의 물을 빼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남짓이었다.

처치를 끝내고 병원 6층 내분비외과 병동의 여자 병실로 함께 들어갔다. 박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서자 50대 후반 여성 환자가 불러 세운다.

“선생님 나 가슴 좀 봐줘. 이상하게 꿰맨 것 같아.”

환자는 박 간호사가 다가오자 아무 거리낌 없이 단추를 풀어헤쳤다. 커튼을 친 뒤 환부를 확인하고 질문에 설명을 이어간다. 수술 부위에 대한 환자의 걱정은 이내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환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 간호사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반복되는 환자의 질문에 지겨울 법도 한데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한다.

여자 환자에게 남자 간호사가 혹시 불편하진 않을까. 환자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회진을 도는 교수님한테 못 물어 볼 이야기를 오히려 박 간호사한테는 자연스럽게 물어본다”고 입을 모았다. 50대 여성 갑상샘암 환자 이모씨는 “박 간호사가 설명을 잘해줘. 병원 간호사 중에서 인기 짱이야”라고 말했다. 박 간호사는 민감해하는 환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기 위해 환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외운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공감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축구와 군대 이야기로 의사들과 친목
남자들의 공통분모는 군대다. 고민석(29·수술실) 간호사는 강원도의 한 사단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이곳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간·소화기센터 전장용 교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같은 부대에서 전 교수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알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고 간호사는 “자연스레 병원에서도 군 복무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부 남자 간호사는 레지던트 의사들과 쉬는 날에 병원 내 축구모임도 즐기면서 허물없이 지내는가 하면 이성 고민 같은 은밀한 이야기도 털어놓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어느덧 오후 7시. 체험의 마지막 일정은 다시 응급실이었다. 여전히 정신없이 바쁜 김춘탁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지만 김 간호사의 손끝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제가 못 챙겨드릴 수도 있어요. 여기는 전쟁터예요.”

정중했지만 단호한 그의 말에선 전쟁에 나서는 장수의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는 ‘백의의 천사’이면서 ‘백의의 전사’였다.


나은섭 인턴기자 reporter1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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