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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성역도 성역 나름

인간사회에 성역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옛날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집단생활을 통해 서로 협동하면서 생존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를 이뤄 왔다. 집단생활은 많은 장점이 있지만 구성원의 생각과 욕구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갈등을 조절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성역은 국가·지역사회·종교·가정에 존재하는 장소·사람·사건 중 중요한 부분을 보호하고, 발생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성역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구역이나 문제 삼지 아니하기로 되어 있는 사항·인물·단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면서 ‘성역 없는 수사’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를 예문으로 들었다.

임금이 살던 궁전이나 절·성당·예배당, 나아가 오늘날 거의 사라진 성황당 같은 곳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장소적 성역에 해당할 것이다. 특정 장소나 건물이 어떤 가문이나 개인에게 성역으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왕·귀족·성직자 같은 특정한 사람, 보다 넓게는 부모처럼 존경하는 사람이 성역의 영역 안에 든 존재일 수 있다. 또 국가나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나 혼인·출생·장례같은 행위가 어떤 구성원들에게는 성역에 해당할 것이다. 성역이 무엇이든 이를 성역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 아마 계속해서 지켜가려고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왕과 왕궁이라는 정치적 성역은 해체됐다. 학문의 발전으로 지식의 성역도 좁아졌다. 언론 발전에 힘입어 사회에 존재하던 많은 성역의 베일도 벗겨졌다. 또 전 세계 사람을 연결해 쉽게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덕분에 인간의 자의식과 분별력이 강화되면서, 불필요하게 성역의 베일 속으로 숨어드는 일은 매우 힘들게 됐다.

이러한 일은 모두 바람직한 현상이다.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되는 요소는 과감히 벗겨내고 털어내 버려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하게 국가·사회·가정·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부담을 줄여 평화로운 삶과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여전히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성역도 많이 있다. 나무의 뿌리가 어두운 땅 속에 있어야만 그 나무의 생존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나의 생존과 성장에 꼭 필요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할 성역이다. 매사를 투명한 유리 속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화장실에 있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나의 탄생의 기원이자 모든 생명의 기원이기도 한 남녀 간의 결합이 성역에 머물지 않고 단순히 놀이의 대상이 되거나 구경거리의 대상이 된다면 인간 존재를 얼마나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인가.

인간세계의 번잡함과 갈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삶에서 근본적인 것과 그 의미를 생각하고, 믿음 속의 절대자를 만나기를 원할 수 있는 절·성당·예배당 같은 성역이 없다면 이 또한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경직되게 만들 것인가.

가정·학교·회사·지자체·국가가 올바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의 성역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것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성역이 점점 좁아지는 오늘날, 불필요한 성역은 제거하되 필요하고 중요한 성역은 제대로 지켜나가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전헌호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석·박사 학위(신학)를 받았다. 현재 인간과 영성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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